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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섭 Sep 01. 2024

캐나다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되었다

오십 대 초반의 나이에 이방인이 되었다

캐나다에서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구나 어떠한 상황을 뒤돌아보면서 예견되지 않았던 일들이 현실에 와닿을 때 이런 표현을 종종 하곤 한다.


캐나다 이민 정착 시기를 가족들보다 무려 8년이나 늦게 시작했다. 한국에서 8년의 기러기 생활을 보내고 이후 가족이 있는 캐나다 합류를 했다.


2024년 1월 14일 한국에서의 직장 환경과 직위를 몽땅 내려놓고 캐나다행 비행기 탑승했다. 떠나던 그날은 내겐 생일만큼이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날로 남아야 한다고 그땐 생각했다. 탄생이라는 생일의 기쁨처럼 과연 이민을 시작한 날도 기념비적인 날 기억 속에 등극을 시켜야 둬야 할까, 하지만, 내겐 기억해 둘만큼 만족스러운 이민생활 가져다주 못했다. 

 

이민생활은 최소한 10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져보아야 정착이 된다는 속설이 존재했다. 한국에서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이민 생활을 통해 송두리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민생활처럼 한국 사회에서 편견 없이 이목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을 했었다면 부자는 물론이고 적어도 준 재벌 정도의 신분으로 성장하지는 않을까 라는 우스개 소리를 가끔씩 한다.


이민 정착 후 일은 쉽게 찾았다. 가드닝 일부터 시작하여 식당에서 그릇 닦는 일에 헬퍼까지 일의 종류나 성격을 따지지 않고 열심히 해왔다. 사실. 이민 전에는 생각조차 못한 일들이었다. 이민 1세대는 돈 없이 와서 거칠고 험난한 일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나 또한 그들이 이야기하는 1세대가 맞을 것이다. 이민생활에 차츰 적응과 함께 안정을 가져오면서 캐나다 회사입사하는 행운을 얻었다 다. 한인사회에서 캐네디언 회사에 다니는 것은 이민자들에게는 로망과 같았다. 회사에는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직장 내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무엇보다 언어 영역이다. 차츰 회사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좀 더 전문적인 부서로 이동이 되었다. 팀에 팀장은 캐네디언 여성인이었다. 팀장은 어느 날부턴가 인종 차별도 모자라 시기와 질투가 시작되었다. 상대를 수용해 나가기엔 인내가 부족하였다. 결국 고심 끝에 입사 1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인종차별로 인한 자발적 사직이었다. 자발적 사직은 실업급여 신청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해진 법의 테두리 안에서도 이유가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도 구제받을 수가 있다.


자발적인 사직에 관한 이유를 첨부해서 캐나다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며칠 후 회신이 왔다. 실업급여를 지급해 주겠다는 내용이다. 캐나다 정부는 나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캐나다 직장 내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는 사례가 되었다. 그 충격 때문에 직장생활이 아닌 내일을 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땐 무슨 배짱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단, 1%의 경험도 없는 카페를 시작했다. 아내는 서빙과 카운터를 동시에 담당하고 나는 커피를 만들어 내는 바리스타가 되었다. 이전 주인이 건네준 매뉴얼로 사업의 성과를 가져오기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년 만에 카페는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운영의상 적자로 전환되면서 카페를 얼마 정도 권리금에 손실을 안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카페를 처분하는 과정 중에 리얼터를 통해 부동산 동향을 알게 되었다. 아내가 발품을 팔아가면서 몇 년 전 사두었던 주택가격이 급 상승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차이나 머니라는 외화가 유입이 되면서 중국인들 사이에서 부동산이 원활하게 움직이던  시기었다. 중국인들은 묻지마식의 방법으로 집 사재기가 한참 성행했다. 집을 내놓으면 몇 시간도 안되어 높은 가격으로 매매가 이루어져 갔다.


집을 매매하고 넓은 콘도로 이사를 했다. 남은 돈으로 지인과 작은 상가를 매매해서 식당을 공동 운영했다. 동업자는 20년 이상 식당 운영을 한 경험자이다. 경험도 없는 파트너와 손발이 맞을 리가 없었다, 끝내 동업자와 의견충돌이 표면화되어 가면서 운영권을 포기하고 투자금을 회수했다.


그 후, 새로운 직장을 잡았다. 그리고 몇 달도 안되어 팬더믹이 창궐하고 2년 반의 공백기를 보냈다. 정부는 팬더믹 동안 매달 2천 불을 지급해 주었다. 팬더믹이 끝남과 동시에 또다시 취업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한국 커뮤티 사회로 진출했다. 종교단체 시설관리 업무이다. 그곳에서 2년 ,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 책임자에 위해 철저한 직장 내에 따돌림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상처와 함께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명예 회복이 필요했다. 특히 같은 교민사회 그것도 종교시설 내에서의 책임자 행동은 상식선에서 쉽게 이해가 않는 행동을 해 왔다. 캐나다 정부는 이번에도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명예는 회복되었는데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시련은 혹독했다.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정신과 치료라도 받아야 할 상황까지 왔다. 그때 당시 아들은 이탈리아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있었다. 아빠의 상처를 알고 있기에 아내와 함께 12일간의 이탈리아 여행 스케줄을 짜서 비행기 표와 함께 보내왔다. 아들과 이탈리아에서 합류를 했다. 브런치에 문밖 세상으로 12일간의 여행이라는 연재한 글에 내용이 있다. 그것이 작년 2023년 12월의 일이다.


올해 2024년 2월 28일 한국행 비행기로 옮겨 탔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일과 함께 역이민을 고려해 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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