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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h May 09. 2024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사회 추락의 신호탄

  아파트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하늘이 사뭇 작고 좁다. 도시에 살면 그 작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때가 있다. 아들이 아파서 연휴 내내 병원에 갇혀 있었더니 하늘 볼일이 더욱 없었다. 이 주 전 주말에 둘째 아이 눈 위가 찢어져 소아 성형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 ‘지금은 절대 아프면 안 될 때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첫째 아이가 뇌수막염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정말 겨우겨우 입원하였고, 쫓겨나듯 가퇴원했다. 가퇴원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다행히 큰 아이라 빨리 회복한 것에 감사하면서도 지금의 상황에 기분이 상하는 것은 엄마로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척수 검사를 시행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 병원을 옮겼고, 또 의사의 실수로 척수 검사를 여러 번 실패했다. 일주일 내내 아이가 잘 걷지 못했고, 가족 모두 겁을 먹었다. 살 떨리는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아이들의 아픔 다 모아서 제게 주시라고 했던 기도가 문뜩 생각이 낫다. 그 기도는 실제로 내 암으로 찾아온 기분이었고, 다신 그런 기도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또다시 그런 기도를 하고 있자니 참 민망하고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상황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또 무력해졌다. 아이는 아프고, 의사는 없다. 버티기엔 큰 병이고, 내가 대신 아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 하늘은 나를 자꾸 극단적인 상황에 몰아넣는 것일까. 고난의 중심에 서 있는 당신이 주인공이라고 말하던 내가 이런 삶의 주인공이고 싶지 않은 것은 모순인 것일까. 고난, 다음에 고난, 다음에 고난, 그다음엔 무엇이 와야 할까.


  ‘그래, 이제 고난 말고 크게 행복하고 싶어’라고 자주 생각했고 그래서 고민했다. 삶은 무력한 것이어서 작은 기쁨만으로는 살 수 없다던 어느 작가님의 말처럼 작은 기쁨들을 모아 살기엔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버이날을 핑계 삼아 아이가 아픈 와중에도 짬을 내서 친정에 갔다. 내 고통을 싸다가 엄마에게 주었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엄마도 아플 걸 알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조금 울고 나니 내가 들 아팠다. 자식이 아픈 마음, 자식의 자식이 아파서 아픈 마음을, 부모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을까. 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고통 앞에 서 본 적 없는 이들이다. 기대어 살아야만 살 수 있다는 마음, 한 아이 돌보는 데에 8명의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하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손바닥 만한 하늘 생각이 낫다. 나는 그 작은 하늘 말고 큰 하늘이 보고 싶었다. 나 혼자 버티며 살면서 얻는 작은 행복들 말고 다 같이 크게 행복한 기분말이다.


  작금의 의사 파업 상황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그저 이 이상한 나라의 한 엄마로서 이 나라에서 아이 키울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동안은 부끄러웠다.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으면서 아이를 낳은 부모로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나의 어리석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들키기 싫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리 높여 말할 수밖에 없다. 아이가 도랑에 빠졌는데 병원을 돌다가 사망하게 된 뉴스를 보면서, 부모는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아이가 도랑에 빠지게 두었는가 말하는 이들을 보았다. 밭을 매고 있었겠지.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이유가 중요한 것인가. 아이가 죽길 바라는 부모가 있는가. 우리는 부모이지만, 자주 어리석고, 좀 나은 어른, 좀 더 나은 부모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애쓰는 모습이 부끄러운 사회는 되지 말아야 한다.

  사실 나는 아이를 더 낳고 싶었다. 그러나 낳을 수 없었다. 나의 가족도 나의 공동체도 나 스스로도 키워낼 능력이 없었다. 나는 때론 부모님을 탓하고, 주변을 탓하고, 자주 나 스스로를 탓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은 변한 적이 없지만, 심지어 남편도, 나이 두 아이도 동생을 원하는 상황은 달라진 적 없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아이는 경험한 적 없는 기쁨을 맛보게 하고,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부끄럽게 만들면서도 나를 겸허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유일한 인간이다. 우리는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배웠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나의 가족도 공동체도 사회도 같이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어른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이 의료 대란이 의사들의 이기심 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사회가 무너지는 신호인가?

  부끄러운 사회가 되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히라 생각해야겠다. 이제 성장할 차례이니까. 아파트 그림자와 그림자 뒤로 가려진 하늘을 이제는 볼 수 있어야 한다. 높이 솟은 부끄러움 뒤로 우리가 진정 보아야 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무가 숨겨져 있다. 그 하늘을 보지 않고는, 모두가 같이 성장하고 행복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이대로 한 뼘짜리 하늘을 바라보고 살 텐가. 영원히 삶의 가장 큰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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