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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익 Dec 10. 2023

본다는 것의 의미


융합스튜디오에 이어 두 번째 수강한 수업은


*현대예술과 기초드로잉'이었다.


동시대 미술사와 드로잉을 함께 배우는 수업으로

미술 기본기가 없는  라테에겐

특히나 필요한 수업이었다.


첫 시간,  교수님께서


모더니즘의 시작은 누구일까?


인상주의에서
모더니즘의 전환을 열어젖힌 화가는?


라는 질문을 하셨다. 누군가 답을 했다.


세잔입니다!. ^^


오! 정딥!


말씀이  이어졌다.


폴 세잔이 위대한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닌

작가의 눈에 비친  세계를

처음으로 재현해 냈기 때문입니다.

고호, 고갱, 르느와르. 이런 사람들의 그림은

현대미술에선  언급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화가들이죠,  

하지만 그 들은 오래전에 사진처럼 세상을 재현한

그림을 그린 거예요.  


아 그렇구나.


동시대 미술이란

이제껏 라테가 알던 세계의 재현으로써의

미술이 아니었다.

또 그 시작이 벌써 백여 년 전이라니...

라테는 허무하기까지 했다.


라테의 성장기,

 군사독재국가였던 7,80년대 한국에서

서구 현대 미술씬의 전복적  예술 흐름이

소개될 리 만무했지만..

고갱 고흐... 피카소 등이 미술의 전부인 줄 알았던

학창 시절 미술시간ㅠ

우물 안 청개구리 같던 라테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동시대 예술을 배우고 알아갈 생각을 하니

뭔가 심쿵하기까지 했다.


드로잉 실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미대 입시 학원에서 오랜 수련을 거친

동기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ㅠ

라테는 사실 뭔가를 그린다는 자체가

사실 어불성설인 상황이었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4b 연필을 움켜쥐었다.


첫 드로잉 과제는 손이었다.  

교수님께서 조건을 다셨다.

기존의 드로잉 하듯

대상과  스케치북을 번갈아 보면 안 되고

오직 손만 보고! 그려야 한다고 하셨다.

주어진 시간은 1시간.


헉!

상상도 못 한 과제에 충격을 받은 채

한쪽 손만 보며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주야장천 손만 노려 보면서  그려보는데...

 

와... 이렇게 어떻게 그려?


화가 날 정도로... 답답했다.

눈 감고 그리는 거랑 차이가 없는 느낌..ㅠ

스케치북을 볼 수 없으니 세상 이렇게 답답할 수가..

딱 한 번만 스케치북을 볼까?

하는 유혹이 수시로 찾아왔지만

라테는  뚫어져라 손만 보면서...

죽인지 밥인지 모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손을 보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어, 내 손이 이렇게 생겼었나??


기억 속의 내 손과는 상당히 다른 비주얼의 손...

하루에도 수백 번은 스치듯 본 손이고

무려 52년간 함께 했던 손이었는데...

비슷한 손들을 보여주며 고르라고 하면

못 고를 정도로 낯설게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라테는

그 무수한 날들 속에서

자기 손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거의 없었단 걸

깨달았다.ㅠ


물건을 집을 때나 자판을 두드릴 때나 문을 열 때나

허구한 날 보는 손이니

당연히 안다고 착각했을 뿐...

정작 그 손이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는지..

별 관심이 없었고

그만큼 몰랐던 거였다..

 

사뭇 미안한 심정으로

퉁퉁해지고 쭈글쭈글해지고...

세월 속에 ㅋ 어느새 낯설게 변해버린  그 손을

비로소 찬찬히 바라본다...

그리고  열심히 그려본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스피커밖으로 울려 퍼지는 교순님의 목소리.


자! 그린 거 올려보세요!!!


우와!

동기들의 드로잉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대단했다.

개성이 넘쳐흐르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선들의 향연!


와... 세상에..

생전 본 적 없는 스타일들..

저렇게 멋진 선들...

 아...


감탄하기 바쁜 라테는 자신의 그림과

동기들의 그림을 비교하며

자존감이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데~~


라테의 첫 번째 드로잉.....-.-;


 교수님의 마이크가 켜졌다.


여러분, 진정한 선은

가위로 오린 것처럼 매끄러운 게 아니라

울퉁불퉁, 찌질찌질... 한 선입니다.

우리 계원 학생들

역시 잘 그리네요.. 오랜 시간 닦아온 실력 인정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린 멋진 손은

여전히 기존의 머릿속에 박혀있던

사람의 손, 손 드로잉이라는

관습적 이미지에 가까워요.

사물을 세상이 제시한 관습적인,

정형화된  눈으로 보면 안 됩니다.

더 자기 마음대로, 엉망으로ㅋ 그려야 합니다.

사물의 형태는 결코 매끄럽지 않아요.

삐뚤삐뚤, 찌질찌질,

크레용을  든 애기가

처음으로 뭔가를 그려냈을 때의 그 선처럼.

자기만의 눈으로 사물 고유의 선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본다는 것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의 의미...


난생처음 맞닥트린  난제 앞에서 라테둥절 하면서도

교수님의 말씀을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손은 물론, 내 주변의 모든 사물들,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본 적 없었던 것 같다..

가족, 친구,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왜 잘 안다고 착각했던 걸까...

아.... 그 당혹감이란...


더 늙기 전에 빨리 동시대 예술을 배워서

나만의 생각들을  표현해야지...

라는 성급한 생각에 가득 차 있던 라테는


그전에  세계의 형상을 제대로 보아야 했다.

이걸 동기들은 약관 스무 살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50이 넘어 알게 되다니...

뭔가 억울한 심정의 라테...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디인가...


본다는 것의 의미..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찬찬히 알아가자..

융예과에 오길 정말 잘했어! ^^

 (본다는 것의 의미는

미술평론가 존 버거의 저서이기도 합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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