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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5개월째

점점 느리게 살기에 익숙해지며

미국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0월, 가을의 한가운데였다. JFK 공항에 내려 한인 업체가 운영하는 밴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보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 불안감 속에서 뉴욕의 도로를 달렸다. 벌써 5개월이 흘렀고, 이곳 생활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여전히 모든 것을 한국과 비교하며 살아가지만,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즐거움도 지루함도 뒤섞여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잊고 지내는 것들이 많다. 재미있는 영화나 예능을 보며 시간은 빨리 흐르지만, 문득 멈춰서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지난날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
작년 퇴사 직전, 한 선배가 내게 한 말이다. 정말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예정된 길이었을까.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때의 일이 지금의 나를 이곳에 서 있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2년간의 주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혼자였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외로움은 늘 곁에 있었다.

돌아온 동네에는 카페가 늘었고, 무인 상점이 생겼으며, 버스 노선도 복잡해졌다. 그러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너무 익숙한 풍경은 오히려 두려움을 안겼다. ‘이렇게 살다가는 아무런 변화 없이 시간만 흘러가는 것 아닐까.’ 그 두려움은 결국 나로 하여금 가족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20년 가까이 다닌 직장이었다. 퇴사 서류에 도장을 찍고, 더 이상 내 이름이 회사 전산망에 뜨지 않을 때 느낀 허무함은 주민등록이 말소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저는 지금까지 남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것 같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비슷한 시기에 입사하고,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하지만 퇴사만큼은 달랐습니다. 모두가 여전히 달리고 있는 경주에서, 나 혼자만 레이스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혼자만 죽음을 맞이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미국에서 지내며 그때의 심정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시간은 무심하다. 뼈아프던 슬픔도, 치열했던 기억도, 파도에 쓸린 모래 글씨처럼 이내 사라져 간다.

그래서 나는 글로 남긴다. 힘들었던 기억도, 행복했던 기억도 시간 앞에서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그립다. 서울의 밤이, 동료들이, 치열하게 고민하던 순간들이, 그 시간 자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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