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교직 생활을 했던 나에게 논어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즉 '배우고 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거의 금과옥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학생들을 지도할 때는 무엇보다도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자주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가르치고 배운다는 아름다운 관계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제도적 장치 속에서나 작동할 뿐이지,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면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양자간에 자존심이 걸린 지극히 심리적인 문제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동등한 위상에서 부지불식간에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부부 사이에는 종종 감정 싸움으로 번지기 십상이다.
우리 부부의 예를 들어 보자.
아내가 마트에 가서 상추와 고추를 사와서 냉장고에 그냥 넣길래 한마디 했다.
''그거 씻어서 집어넣어야지 언제 다시 꺼내서 씻으려고.''
''아니, 집어넣었다가 씻어 먹으면 왜 안되는데?''
''그러면 상온에 있던 상추를 차갑게 했다가 씻느라고 다시 물에 담가야 하니 전기가 낭비되는 거 아냐?''
''그깟 전기 얼마나 든다고? 내가 마트에 다녀오느라 힘들어 좀 쉬다가 하려는데. 별거 아닌 거 갖고 사람 힘들게 하고 그래.''
''조금만 참고 씻어 놓으면 더 편할텐데. 그리고 지구 환경도 생각해야지.''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둬. 힘들어도 내가 힘들고, 귀찮아도 내가 귀찮아. 얼마나 더 가르쳐줘야 알아 들어? 내가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야?''
이쯤 되면 서로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상대방에게 아무말이나 퍼붓다가 급기야 냉전 상황으로 돌입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온 내 입장에서 아내의 발언 중에 나온 '가르쳐준다'는 말에는 그야말로 꼭지가 돌 지경이다.
내 나이쯤 되면 남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도 밤에 자다가 쓰잘데기 없는 꿈을 많이 꾸는데,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교무실에서 교실로 수업 들어가기 전의 상황이다.
수업 시작 종은 울렸는데 수업용 교재를 찾지 못해 책상 위며 책장 속을 샅샅이 뒤진다거나, 수업할 교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서 여기저기 계단이나 복도를 따라 애타게 헤매다가 겨우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
퇴직한 지 4년이나 되었는데도 이런 꿈을 자주 꾼다는 것은 내가 교직에 있을 때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일에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 때나, 어떤 대상에게나 그런 행동으로 표출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하는게 좋겠네.''라고 말한다는 건 그것의 '옳고 그름'이나 효율성 등, 가치 개념을 떠나서 '나는 너보다 똑똑하다.'는 주장과 다름없는, 즉 서로간의 자존심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자주 반복되다 보면, 그건 의견 제시가 아니라 듣기 싫은 잔소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일까?
아내는 주로 집안에서 살림을 꾸려오며 소소한 일상을 보내며 살았고, 나는 거의 밖에서 직장 생활을 했는데,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아내보다는 내가 훨씬 더 자주, 작은 일에도 일일이 간섭을 하면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적이 많은 것 같다. 아내는 한두번 참다가 폭발하게 되는데 정말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러면 나는 '다시는 참견을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며칠만 지나면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만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몇 년 동안 집에서 지내다보니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그리고 내가 좀 여성스러운 면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별 거부감없이 해 왔다.
물론 아내가 고마워하고 나도 좀 으쓱하는 기분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더 갈등이 생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도와준다고, 좀더 힘이 덜 들게 하자는 취지에서 집안일에 대한 의견을 내지만, 아내는 자기가 쭉 해오던 방식이 있는데 왜 쓸데없이 간섭을 해서 힘들게 하느냐는 식이다.
내가 하는 행동 중에서 아내가 유독 싫어하는 것이 냉장고에 뭐가 있나 살피는 거다. 꼭 자기 휴대폰의 통화 내역 같은 걸 뒤져 보았다는듯이 아주 질색을 한다. 나는 '그냥 내일 뭐 먹으면 좋을까?', '혹시 우유같은 거 사와야 하나?' 궁금해서 열어본 것 뿐인데.
결국 내가 하는 의견 제시는 불필요한 간섭, 상대방의 영역에 대한 부당한 침범이 되고 만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좋은 의미다. 만약 교육이 없었다면, 우리 인류가 오늘날의 찬란한 문명을 이룰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우겠다'는 상대방의 수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일방적으로 무조건 상대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은 당연히 반발심만 초래할 뿐이다. 그래서 다양한 교육 이론이나 교수 방법이 있는 것이겠지.
오늘도 나는 혹시 잘못된 게 없나 하고 방안을, 화장실을 둘러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만 참견을 해 본다.
'여보, TV 켜 놓고 그냥 화장실에 들어가면 어떡해?'
역시 직업병은 고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