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유선생 Oct 26. 2022

첫사랑 다시 만나기

첫사랑이란 누구에게나 평생동안 간직하고 싶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추억일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첫사랑의 대상을 다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4 년 전, 나는 30년이 넘도록 광양에 있는 중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느라, 직장에서 맡은바 업무에 충실하느라, 곁눈질 한번 없이 달려온, 조선시대였다면 일상적이었을 대장부로서의 호시절은 조금도 누려보지도 못하며 지내다가, 정년퇴직으로 겨우 교사라는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 어쩌면 제멋대로 살 수도 있는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어 세상 사는 재미 좀 느껴보나 했더니, 얼마 후 코로나 19가 찾아와 3년이 넘도록 감옥에 갇혀있는 기분으로 삶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일까?


까닭없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견딜 수 없는 족쇄로 느껴지고, 아득히 먼 과거, 특히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던 소년 시절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쌓아왔던, 제도권 내에서 안주하던, 다소 무미건조한 생활 방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일 수도 있다.


여하튼 나는 퇴직을 하자마자 일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냥, 한번만이라도 예전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특히 고 1 시절, 매일매일 가슴 설레이면서 좋아했던 첫사랑을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은, 그저 단순한 바람을 넘어, 죽기 전에 꼭 이루어야 할 버킷리스트로 자리잡았다.


다행이랄까? 언제든 그녀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통로는 항상 열려 있었다. 이제 그녀와 만나게 된다면, 거의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감격적인 해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강원도 영월 읍내의 언덕에 위치한 아담한 기와집에서 보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몇 개월쯤 지난 어느날부터, 동급생이던 그녀와의 첫사랑은 시작된다. 나는 그 시절, 집 창가에 기대어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어느날 아침 30미터쯤 앞에 난 행길을 지나가던 그애를 발견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보다 꽤 먼 거리에 있는 학교라서 일찍 등교하는 모양이었다. 까만 교복, 양갈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얌전한 걸음걸이가 마음에 와 닿았다. 이후 날마다 그 시간쯤 창가에 나와 그애를 바라보곤 하다가, 말하자면 연정이 싹텄다. 며칠동안 끙끙대면서 러브레터를 썼고 친구를 통해 그애에게 보냈다.


드디어 가슴 두근거리며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되었던 첫만남의 순간을 회상할 때면, 나는 영락없이 수줍음 많은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까만 교복의 하얀 칼라에 받쳐진 그애의 달덩이같이 환한 얼굴을 마주하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몸둘바 몰라하던 소년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는 집이 서로 오백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지만, 소위 '플라토닉 러브'라고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한적한 곳을 배회하거나, 서로가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적은 노트를 교환한 게 연애의 거의 전부였다. 용돈도 거의 없었고 학교 선생들의 단속이 심해서, 하다못해 빵집이나 음식점에라도 가본 기억이 없다.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난 후 1년 정도, 그애는 정말 내 모든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 속에는 또다른 세계가 들어왔다.


고교생활의 후반기로 가면서 나도 장래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불타올랐던 열정도 서서히 식으면서, 우리 관계는 둘만의 만남에서 집단적인 만남으로 바뀌어갔다. 그애 친구들 5명과 내 친구들 5명, 도합 10명이 친목 모임을 조직해서 여럿이 함께 놀러 다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우리 사이는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되어 드문드문 만나다가, 2년 정도 지나 내가 군에 입대할 무렵엔 정말 자연스럽게,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 없이 멀어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잊혀진 존재로 남게 되었다.


내가 제대한 후 대학에 들어간 해에 그애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 외에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좀 슬펐는지 어떤지 기억도 없다.


그렇게 서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잊은 채, 각자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내가 정년퇴임을 앞둔 어느날부터인가 그애의 모습이, 목소리가, 의식 저편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안개와도 같이 몽롱한 그리움은, 한번만이라도 그애를 보고야 말겠다는 열망으로 자라났다.


코로나가 유행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몇 년 전에 그녀에게 만나자는 연락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우리가 예전에 결성했던 10인 모임 멤버 중 한 명이 우리들을 단톡방에 초대해서 조만간 원주에서 모이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때부터 좀 마음이 급해졌다. 거의 50년만에 첫사랑의 그녀를 만나게 되는데, 여러 친구들 사이에서 데면데면하게 마주친다는 건, 지금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려왔던 시간들이 너무 억울했다.


수없는 망설임 끝에, 그녀에게 모임 전에 우리 둘이서만 먼저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곧 그녀에게서 그렇게 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회답이 왔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날부터, 나는 여우를 만나기 한참 전부터 가슴 설레이던 어린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점점 높아만가는 파란 가을 하늘, 길가에 피어 있는 이름모를 꽃들이 왜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였을까?


마음 깊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함께한 그 시간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리워한 시간과 그 이후에 남을 추억이 합쳐지기 때문에 더 큰 기쁨이 되는게 아닌가 생각해 봤다. 만나면 그녀에게서 듣고 싶은 말,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내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꼬치꼬치 물어 왔다. 그냥 고교시절의 친구들과 만나는 거라고 둘러댔다. 지금 이 나이에 바람을 피울 것도 아니고, 사실상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만큼 부끄러운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서 부부 사이에 분쟁을 일으킬 소지는 없애야 했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둘이서만 만난다는 사실은 숨겼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최대한 깔끔하게 차려 입고 원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겠다는 그녀의 호의를 사양하고, 택시를 이용해 만나기로 약속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인들 눈에 띄어, 외간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더라는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백년손님'이라는 식당 앞에서 하차.


'드디어 첫사랑 그녀를 만나는구나.'


가슴이 막 뛰었다.


주차장 한켠에 세워진 승용차의 문을 열고 그녀가 나타났다.


'과연 그녀는 예전처럼 여전히 예뻤을까?'




그러나 세월의 흔적은 잔인했다. 얼굴의 윤곽은 그대로였지만, 자글자글한 주름과 생기를 잃은 피부는 숨길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예전에 나를 황홀하게 하던, 얼굴 한가득 뿜어내던 아우라나 감미로운 목소리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기억의 창고에 간직되어 있던 그녀는 진짜가 아니었던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특히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입력할 때 저장되는 그 기억은, 대상 그 실체라기보다는 자기가 조작해 놓은 이미지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기억 속에서 떠올리는 대상의 모습은 자신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그 대상의 실제 모습에 자기가 바라는 색깔로 계속 덧칠을 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그리워하던 대상을 만났을 때, '혹시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다.


무지개가 황홀하게 아름답고, 밤하늘의 별이 신비롭게 반짝이는 건, 우리가 실제 삶 속에서는 절대로 소유할 수 없고, 꿈 속에서나 소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 음식을 권하면서 밥을 먹고 나서, 근처에 있는 치악산 자락을 잠시 산책했다. 9월말의 신선한 공기로 인해 더욱 푸르러가는 가을하늘과 지금 막 피어나서 자기를 봐달라고 흔들리는 코스모스들 사이에서, 우리는 바로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통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녀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문득 비치는 얼굴의 그늘이, 다소 무너져내린 몸매가 지나온 삶의 무게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 당시, 영월 읍내에서 잘나가는 한의원집 큰딸로 자라서, 부잣집 마나님은 아니더라도 부족한 것 없이 잘살 것 같았는데, 지금 형편이 어렵다는 티가 여실히 드러나, 나는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산책 후 카페에서 커피를 함께 나누고 나서, 우리는 뭔가 풀지 못한 숙제를 떠안은 학생들처럼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3시간 정도에 불과한 이번의 만남을 위해, 나는 이전과 이후에 얼마나 많은 번민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피천득님의 수필 '인연'에서, 필자가 아사코를 첫번째, 두번째 만난 건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장면을 자꾸만 떠올리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는 오래된 소꿉친구처럼 자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나이를 불문하고, 남녀가 자주 만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다. 더구나 각자의 가정이 있는 우리가, 자기의 배우자나 자식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다른 이성과의 만남을 지속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나이에, 부부가 합심해서 여태까지 공들여 쌓아왔던 가족이란 이름의 탑을 쉽게 허물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반평생을 함께해 온 동반자에게 견디기 힘든 아픔을 안겨줄 수도 있는 일인데.


내가 그녀를 만나고 돌아온 날, 아내는 내가 친구들 여럿과 함께가 아니라 그녀와 단둘이 만났다는 사실을 금새 눈치채고, 엄청 놀리면서도 섭섭하다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악수 정도만 했고, 대화도 예전에 있었던 일이나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니, 나는 떳떳하다고, 부끄러운 짓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아내의 기분이 몹시 불편했을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예전의 그 멤버들이 함께 만나는 자리에 어차피 한번은 가야할 테지만, 아무래도 이 인연의 끈은 두번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끊어버려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추억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더욱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전 15화 ‘가르친다’는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