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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현진 Sep 20. 2022

나를 관찰하면 보이는 것들

관찰 | 인간 지성 최고의 형태는 관찰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막내 이모가 집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자주 놀러 갈 수 있으니 뛸 듯이 기뻤다. 방학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이모네 집으로 놀러 갔다. 이모네는 나보다 어린 친척동생 두 명이 있었다. 집에서와는 다르게 이모네 집에서 친척동생들과 노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형, 누나, 그리고 나는 내 집 드나들 듯 이모네 집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다 같이 밖으로 나들이를 나가자고 했다. 이모는 음식을 이것저것 준비해서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작은 폭포 앞 벤치에 앉아 친척 동생들과 함께 간식을 먹었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순간 왠지 모르게 창피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모 뒤로 숨어버렸다. 이모는 왜 그러는지 의아해했고, 얼른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 창피했고,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그렇게 나들이는 불편한 마음으로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이때 일을 생각하면서 내가 왜 그렇게 창피해했는지 궁금했다. 공원에서 즐겁게 놀지 못하고, 왜 이모 뒤에 숨어서 빨리 집에 가기만을 바랐을까? 관찰하기를 훈련하면서 이때의 내 마음을 관찰해 보았다. 



 어릴 때는 항상 다른 여자들이 웃고 있으면 마치 나를 보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 나를 비웃었는지 다른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작은 떨림과 함께 그 자리를 얼른 벗어났다.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창피했다. 여자와 대화를 할 때는 항상 불안했다. 내가 혹시나 실수를 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항상 기가 죽어 있었고, 불안함이 늘 함께였다. 그 당시에는 그런 불안함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는 줄 알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시험을 못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시험을 망쳤는지, 왜 더 잘할 수는 없었는지 항상 나 자신을 자책했다. 다른 대인관계에서도 항상 나의 말과 행동에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불안했다. 삼 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난 나는 내가 실수로 태어난 존재 같았다. 세상에 있으면 안 되고, 나 자신이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가정형편을 어렵게 하고, 나로 인해 집안의 돈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져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더 가만히 관찰해보면 모든 것을 실수 없이 해야 한다는 완벽주의 성격이었다. 나의 말과 행동, 만들어 놓은 결과물들은 완벽해야 했다.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1000점인데 현재 내가 생각하는 모습은 0.1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내 모습이 너무나 하찮고 볼품없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0.1도 안 되는 내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불편했고 창피했던 것이다. 심지어 내가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는 것도 싫었다. 내가 말하는 대상만 내 말을 듣기를 원했고, 옆의 다른 사람이 듣는 것조차 싫었다. 그래서 되도록 조용하게 말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나의 미숙하고 어리석은 말을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관찰해보니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큰 이상 없이 그럭저럭 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혼자 이렇게 불안과 죄책감속에서 살았다니… 그때의 어린아이가 불상하고 안쓰러워졌다. 불안을 안고 있던 어린아이가 주변 어른의 도움을 받지는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어설프게나마 부모님에게 불안을 이야기한 적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해.”, “바보 같은 생각 좀 그만해.”라며 이해받지 못했다. 특히 외향적인 성격의 아버지는 나를 더 이해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활발한 성격은 좋은 것이고, 내성적인 성격은 잘못된 것으로 여겼다. 형과 누나는 활발한 성격인데 비해 나만 유독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나를 더 탐탁지 않아했다. 최근에서야 내성적인 성격의 장점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외면받던 성격이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그렇게 이해받지 못하고, 외면받으며 성장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내면서 덮어놨던 상처를 다시 건드린 것 같아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며 새롭게 진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내 모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어.
늘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지 않으려 노력하고,
기쁘게 해 주려고만 했어.
내 스스로의 생각과 창조적인 능력을 억누르기만 했어.
싫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내 자신의 감정을 외면했어!
그냥 나 자신이 되면 그것으로 되었는데,
늘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간절히 갈구했어.
그러면서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몰아세우면서
스스로를 괴롭혔어.
그냥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을 따르지 않고,
나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 지었어.
더 이상 그렇게 힘들고 싶지 않아.
이제는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을 다시 선택하고 싶어.’


 관찰을 통해 내면을 자각한 후, 현재의 내가 과거의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곤 한다. 이모 뒤에 숨어서 창피해하던 아이에게, 가정에서 이해받지 못해 외로웠던 아이에게,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미안해하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그렇게 불안할 수 있어.
당연한 거야.
네가 잘못된 것이 아니야.”


 부모님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을 관찰하면서 나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니 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이 타면 내 뒤에 숨던 서준이의 모습, 이모 뒤에 숨던 내 어린 모습이 교차되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어른이 어린 나에게 저렇게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괜찮기도 하면서 안 괜찮다. 나는 내 아이에게 저렇게 말해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내 뒤에 숨는 아이에게, 불안 해 하는 아이에게, 걱정하는 아이에게 부드럽게 위와 같이 말해준다. 그렇게 말하고 기다려주면 아이는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이내 밝은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부모일수록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고 관찰하자. 그렇게 해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면 아이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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