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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현진 Oct 04. 2022

아빠도 이젠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

판단과 관찰을 분리하자


 코로나19로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층간소음에 신경이 많이 쓰였다. 거실과 주방에 매트를 깔아 놨지만 흥분해서 노는 아이들의 발소리는 아래층에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발뒤꿈치를 들고뛰라고 해도 금방 잊어버리고 놀곤 했다. 이대로 가다간 아래층에 너무 피해를 주는 것 같아 아이와 함께 사과를 하러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사과하러 같이 가면 아이들도 더 주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등학생인 서준이에게 아빠와 함께 가자고 하니 강한 거부를 했다.


 “아빠. 난 안 갈래.”

 “왜 안가? 시끄럽게 했으면 아빠랑 같이 가서 사과해야지.”

 “싫어. 가기 싫단 말이야.”

 “시끄럽게 한건 너희들이잖아. 왜 이렇게 책임감이 부족해?”

 “아빠. 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부담스럽단 말이야. 친구들 만나는 건 괜찮은데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기도 해.”


 아래층에 사과하러 가는 것은 결국 둘째 유준이와 함께 갔다. 아래층 아저씨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건네주며 죄송하고 주의하겠다고 말했다. 유준이는 씩씩하게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배꼽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그런 유준이가 웃겼는지 미소를 보이며 조금만 주의해 달라고 당부했다. 서준이는 다음에 갈 때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서준이가 낯을 가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으면 내 뒤로 숨거나 어려워했다. 나 또한 어렸을 때 낯을 많이 가렸다. ‘이런 것도 날 닮는구나.’라는 생각에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릴 적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을 아이가 했다.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다니.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을 보고 놀라웠고 대견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일방적으로 비판하며 몰아간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가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것은 내 생각, 즉 판단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관찰한 말이 아니었다. 책임감이 부족하기보다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거부를 한 것이었다. 나의 섣부른 판단으로 아이를 몰아세웠다. 이렇게 관찰보다 판단의 말을 사용하게 되면 아이는 비판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리고 부모의 말을 이해할 가능성은 급격히 줄어들고 저항감만 키울 뿐이다.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어렵게 만드는 것은 관찰 없이 솔루션 형태로 제공되는 정보들이다. "A라는 문제행동에는 B로 대처하라." 부모 입장에서는 참 편하다. 나 또한 이과를 전공했기 때문에 이렇게 'A는 B다'라며 딱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모두 같지는 않다. 너무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솔루션을 내 아이에게 적용해 봐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내 아이의 관찰 없이 만들어진 정보로는 아이들의 성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대화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관찰하지 않으면 현재의 감정과 느낌이 어떤지,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내 아이를 사랑하고 잘 인도해 주고 싶지만 관찰이 빠지면 어떤 솔루션을 가지고 와도 효과가 떨어진다. 



 부모라면 잘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은 제대로 된 관찰을 해 본 적이 없다. 위 내 사례와 같이 관찰과 판단을 자신도 모르게 섞어 버린다. 같이 가자는 의도에서 한 말은 아이가 오히려 비판으로 받아들였고, 저항감만 품게 되었다. 이런 현상을 의미론 학자인 웬들 존슨(Wendell Johnson)은 ⟪변화와 함께 살아가기(Living with change)⟫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문제의 일부는 항상 변화하는 지금의 세계를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의 현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다 보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한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최대한 판단을 제외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위 사례에서 "아이가 책임감이 없다"라는 표현보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서준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래서 집에 도착할 시간을 함께 정하고 지키기로 했다. 처음에는 서준이도 시간을 잘 지켜서 집에 왔다. 그런데 점점 30~40분씩 약속한 시간을 어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놀다 보니 시간을 깜빡했다고 해서 휴대폰 알람을 맞춰 주었다. 그래도 여전히 시간을 지키지 않는 날이 이어졌다.


 “서준아. 왜 그렇게 매일 약속도 안 지키고 집에 늦게 들어와?”[판단]

 “매일 아니야. 가끔 그런 거지. 그리고 진짜 몰랐단 말이야.”[저항, 변명]

 “모르긴 뭘 몰라? 알람 소리 들리면 와야지.”[비난]

 “알람 소리 듣긴 들었는데…”


 여기서 또 섣부른 판단의 말을 해버렸다. ‘매일 늦게 집에 온다.’는 말은 판단하는 표현이다. ‘늦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어감과 비난의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는 바로 방어모드로 돌아섰고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은
약속한 시간이 넘어서 들어왔어.”
[관찰]


 부정적이거나 비난의 뜻이 없고 있는 그대로 관찰의 결과만을 말한 표현이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렇게 관찰에 의한 말과 함께 내가 느끼는 감정을 같이 표현하면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은
약속한 시간이 넘어서 들어오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걱정돼.”
[관찰과 감정]



<표> 판단과 관찰 구분하기




 내 아이에 대한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아이를 관찰해 보자.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판단을 쏙 빼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표현한다면 아이의 저항감은 줄어들고, 아빠가 의도한 말이 아이에게 더 잘 전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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