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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현 Oct 18. 2024

디즈니가 '자폐'를 그린다면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넌 어떤 공주 좋아해?” 여자 아기들에게 꼭 한 번은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공주 놀이’. 누군가는 새하얗고 청초한 백설공주를, 누군가는 발랄하고 씩씩하면서도 책벌레를 자처하는 <미녀와 야수> 속 벨을 꿈꾼다. 2014년 <겨울왕국>이 개봉한 이후로는 주인공 엘사의 코스튬이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로 인기였다. 미국 디즈니 숍에 가면 하늘 빛깔의 엘사 의상이 맨 앞에 가장 많이 걸려있었으니까.


한두 해의 일은 아니다. 나도 어릴 때 한창 공주들을 좋아했다. <알라딘> 속 재스민을 좋아해서 인형놀이를 하다가도 공주 인형들의 의상을 재스민이 입은 드레스처럼 모두 오프숄더 형태로 바꿔 입혔다. 성별 고정관념이 많이 옅어진 요즘이고 꼭 모든 아이들이 공주를 좋아하란 법도 없지만, 어쨌든 수많은 공주가 등장하는 디즈니의 콘텐츠는 나 어린 시절부터 지금의 내 아들 딸에 이르기까지 세대 불문 참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다.



디즈니가 품어왔던 다양한 공주들, 우리는 각각 어떤 주인공을 가슴 한 켠에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


단, 디즈니에도 변화는 있었다. 야리야리한 자태의 새하얗던 공주들, 시간이 흐르면서 피부색이 다양한 주인공이 등장했고 설정된 무대의 지역도 다양해졌으니까. 깡마르지 않은 주인공이 등장했고 원래 존재했던 공주도 성격을 조금 달리 한 채 재탄생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콘텐츠가 하나 둘 실사화되면서 캐릭터에 색다른 호흡을 불어넣은 것. <미녀와 야수>의 벨은 ‘엠마왓슨’이 연기하면서 위기가 닥쳐도 강단 있는, 세상 더 씩씩한 벨은 없을 것 같은 아가씨로 재탄생했고, 2019년 나오미 스콧과 만난 <알라딘> 속 재스민 공주는 조용히 숨죽인 채 지내는 삶을 추구하지는 않겠다며 더 독립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왕자님이 짠 나타나서 숲 속의 공주를 깨울 때까지 기다리는, 신데렐라에게 구두를 찾아주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의 모습은 점점 수면 아래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


더불어 새롭게 탄생하는 디즈니의 이야기들은 북미 지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엔칸토>는 콜롬비아의 깊은 산속 이야기를 그렸고 <모아나>는 폴리네시아 신화를 기반으로 가상의 장소 모투 누이 섬을 배경으로 삼았다. <코코>는 멕시코에 사는 소년 미겔이 주인공. 물론 1998년 개봉했던 <뮬란>은 중국이 배경이요, 1992년 탄생했던 <알라딘> 캐릭터는 디즈니의 몇 안 되는 유색인종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지만 주인공이 탄생할 때마다 주목하는 세계가 더 다양해져가고 있음을 실로 느끼게 한다.


주인공들이 공주라는 지위에 국한되지 않을뿐더러, 같은 영화임에도 애니와 실사 사이, 옛날 공주와 지금 공주가 ‘그 공주가 그 공주가 더이상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디즈니. 그렇다면 여기에서 더 다양해질 수 있을까. 문화적 다양성을 넘어서서 ‘신경다양성’의 영역도 감당할 수 있을까.


디즈니가
신경다양성을 그릴 수 있을까
자폐스펙트럼까지 품어낼 수 있을까


디즈니가 ‘신경다양성 (Neurodiversity)’까지도 품을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자폐스펙트럼 (Autism Spectrum Disorder) 공주가, 혹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증후군 (ADHD) 왕자가 시나리오 안에 담긴다면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꼭 주인공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디즈니라는 거대 콘텐츠 기업이 ‘특별하면서도 소외되기 쉬운' 캐릭터를 다룬다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그 어떤 마음을, 혹은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자폐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영역에 대한 관심. 그 외에도 '장애'라는 이름표로 더 쉽게 불리는 영역에 대한 단 한 번의 생각. 그 영역 안에 위치한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작은 관심. 그들을 위해 소소하게나마 할 수 있는 배려. 사람들이 '신경다양성'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고 한 번쯤 끄덕일 수 있도록 이끄는 친근한 동력이 될 수 있을 테니.


디즈니 성 안에 ‘신경다양성’을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2년 전 드라마, 자폐스펙트럼 변호사 우영우의 이야기도 그러했다. 해맑으면서 열정적인 신입변호사를 너무나 잘 소화해 낸 배우 박은빈은 아름다웠고, 우영우의 곁을 지키는 국민 섭섭남도 작품을 보는 재미를 나날이 더했다. 그러나 나는 작품을 보는 내내 '봄날의 햇살 같은' 최수연, 우영우의 동료 변호사가 우리 세상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다. 봄날의 햇살 같고, 여름날의 계곡물 같고, 가을날의 단풍잎 같고, 겨울날의 첫눈 같은 존재가 신경다양성 영역에 자꾸자꾸 늘기를 바란다면, 결국엔 이런 캐릭터의 힘을 살포시 빌려야 하지 않을까.


K 드라마의 힘이 있었다면, 전통의 극강 '월드'를 가지고 있는 디즈니도 한 발짝 나서줘도 더욱 좋겠다. 상상하건대,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신경다양성의 왕자를 만나 깊은 잠에서 깨기도 하고, 백설공주의 동반자 일곱 난쟁이를 통해 신경다양성의 세계를 보여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어쩌면 그 어떤 신경다양성 왕국의 공주가 벽을 허물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렛잇고' 노래에서 느껴지던 짜릿함, 그 이상의 도전을 해나가는 그림도 그려봄직하다. 전 세계 이미 훌쩍 자라 버린 어른들을 사로잡아본 적 있는 디즈니는 신경다양성 왕국의 스토리도 분명 잘 그려낼 거라고 내심 믿어보는 마음.



미래 언젠가는 태어날 그 캐릭터를 미리 응원해 보기로 한다. 디즈니 주인공의 얼굴색이 다양해지고 몸매가 한층 더 현실적인 자태가 되어왔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인공이 활동하는 지역이 조금씩 확장되고 다양해질 때마다 "오, 저게 가능해. 그렇지 여기도 무대가 될 수 있지!" 소소히 감탄해 왔던 시간들이 있었다.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콘텐츠 속에서도 자폐스펙트럼과 ADHD와 불안장애를 스스럼없이 만나고 싶다. 진지하고 무겁고, 무채색으로 표현되는 다큐멘터리에서가 아니라, OST의 잔잔한 선율 안엔서 신경다양성을 만나고 싶다. 신경다양성이라는 키워드가 이토록 특별하지 않게 등장해 줄 수 있는 세상이 곧 찾아든다면 더 좋겠다. 이상하고 기괴하지 않은, 그저 조금 더 예민하고 특별한 기질을 가진 이들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더 판판해졌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 2022년에 우영우가 사랑스러웠듯이, 수년 뒤 더 러블리한 디즈니 속 Neurodiversity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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