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베를린 부부-chicken
언제나처럼 바르셀로나에는 햇빛이 가득했고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내가 바르셀로나에 정착하려는 시간도 꾸준하고 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일상은 미묘하게 변한 듯 변하지 않았고 꾸준한 날씨와 다르게 나의 일상을 위협하는 존재들은 여전히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첫 1년 동안 이사는 3번을 다녔고, 가지고 있던 학생비자는 만료가 되었다. 따로 월급을 받지 않아도 일을 시켜준다는 것에 감사할 것만 같았던 나의 상황은 이제 반 강제적으로 경제적 독립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아주 조금씩 절박해지고 있었다. 당연히 ‘여행’은 나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혼자 하는 여행이 지겨워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사무실에도 제법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도 했다. 당시 사무실엔 큰 두 개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하나는 폴란드 슈체친(Szczecin)의 필하모니, 하나는 스위스 로잔(Lausanne)의 뮤지엄. 작은 사무실은 보통 다 그렇듯, 너나 할 것 없이, 담당 프로젝트라 할 것도 없이 다양한 일들을 했다. 급하면 가능한 모든 인원이 달라붙어 일을 끝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국 같으면 이렇게 한바탕 하고 난 뒤 회식하자고 했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굵직하게 돌아가는 프로젝트와 별개로 새로운 공모전도 준비하고 있었다. 알베르또는 다시 스위스의 공모전에 관심을 가졌다. 사실 이때만 해도, 모두들 에너지가 가득하고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서로에 의한 시너지 효과는 남달랐다. 사무실에 에너지가 가득한 나날들이었다.
사무실의 가장 큰 형이자 소장인 알베르또(Alberto)는 참 성실한 사람이었다. 총 9명의 사무실 인원 중 아침에 가장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 하루를 시작하고 매일 종이로 인쇄된 신문을 읽었으며 틈틈이 독서량도 많은 박식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냥 시간을 쪼개서 잘 활용하는 편이었다. 또한 사무실 인원 중 가장 연장자로서 직원들 간의 분쟁 조절, 불만 해결 등 사무실 직원들을 두루두루 신경 쓰는, 젊고 믿음직한 소장이었다.
EBV에 있으면서 했던 수많은 공모전에서 그는 보통 평면과 단면 등 2D로 그릴 수 있는 영역을 도맡아 했다. 스스로 3D는 할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며 자신의 컴퓨터도 아주 오래된, 구닥다리가 아니라 거의 폐기를 해야 할 정도의 모델을 고집했다. 그래서 정확하게 그가 어떤 손그림을 그리는지, 어떤 스케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지 많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폴란드의 팔 하모닉 홀의 관계자와의 미팅을 혼자 알베르또가 준비하고 있는 걸 봤다.
“알베르또, 뭐해?”
“내일 슈체친에 회의 때문에 가는데 그거 준비해.”
“무슨 회의인데 직접 손으로 그림까지 그려?”
“너도 그렇고 다들 바빠서 그냥 이렇게 간단하게 손으로 그려가려고. 내가 이따 그릴 테니까 이거 스캔해서 출력하는 건 좀 도와줄래? 양이 좀 많아.”
“응 그럼”
그렇게 잠시 동안 그가 손으로 그리는 모습을 봤다. 폴란드의 슈체친 지역에 새로 짓는 필하모니는 규모가 상당히 크다. 그래서 들어가는 입구 홀도 큰 규모이다. 공연이 없는 시기나 비수기에 이 큰 공간을 어떻게 쓰면 될 지에 대해 건축주가 알베르또에게 구체적인 활용방안에 대해 문의를 한 모양이었다. 알베르또는 그걸 하고 있던 것이다.
대강 공간의 구도만 잡혀 있는 사진을 보고 펜으로 그 안에 전시, 공연 등의 상황을 그림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었다. 근데 그 그림이 너무 이뻤다.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서 그렇기도 했고, 또 색감이 아주 잘 표현됐다. 결국 나는 원래 인쇄해야 하는 양에 하나를 더 해서 개인적으로 보관하기로 했다.
“우와, 진짜 잘 그린다! 그냥 이렇게 프레젠테이션 해도 되겠어!”
“(씩 웃으며) 그래? 그래도 나중에 더 크게 프레젠테이션 할 일 있으면 그냥 이렇게는 안 될걸. 그땐 너도 도와줘야 해.”
“그럼, 좋지”
그렇게 완공된 필하모닉 홀. 대지 옆에 있었던 기존 건물의 지붕 모양에서 전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완공 사진에서는 기존 건물과의 관계가 너무 이질적인 색감과 재료로 인해 조금 흐려졌다.
전체 프로젝트의 핵심 아이디어는 '도시의 모습을 닮은 뾰족뾰족한 외피가 메인 공연장을 계단이나 입구 등의 공공 기능으로 감싸는 방식'이다. 사진만으로는 연관관계가 조금 떨어져 보이나 외부에서 접근해 메인 입구 공간을 지나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펼쳐지는 건축적 전개는 상당히 흥미롭다. 베를린에서 기차로 2시간 반 정도면 방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