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오래될 희망
독백연기를 사람들 앞에서 연습해 볼 때, 몰입이 잘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수많은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던 부족한 집중력,
또 하나는 캐릭터의 대사를 내가 겪었던 상황과 완전하게 대입하려고 하는 강박 탓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연기훈련을 하더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누군가가 훈련 중에 엄청난 감정과 소리를 표출하지 않는 이상 나의 상상과 감각 훈련의 호흡은 끊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들이 나에게 오롯이 집중을 할 때에야 긴장감이 높아지고 나의 감각에 집중이 오롯이 되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는 무대공포증, 같은 것이 아닐까.
기업 입사 면접 보러 다닐 때도 늘 긴장감이 높았다.
그때의 원인은 나를 가둬두는 어떤 틀, 때문이었는데
가령 핏한 정장 자켓과 치마, 모나미룩이라고 일컫는 흰색 셔츠와 검정색 치마, 잔머리를 남기지 않은 올백 묶음 머리, 다나까 극존대 말투, 늘 잔잔하게 머금어야 하는 미소, 처음중간끝이 있는 구조화된 답변, 이런 것들 말이다.
이런 규율과 면접의 공식 같은 것들이 나답지 못 하게 만들었고, 틀 안에서 옴싹달싹하지 못 하게 했다.
오히려 합격 연락을 받았던 건, 평소 하고 다니던 앞머리 낸 스타일의 머리, 평소 즐겨 입던 원피스, 준비된 답변이 아닌 즉흥적인 대답들을 했던 면접이었다.
물론 몇 번의 실전 면접을 거친 뒤 어느 정도 익숙해 진 덕도 있겠지만, 나답게 했을 때가 나의 매력이 발산될 수 있었던 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지금, 혼자 연습할 때처럼 나의 진짜 연기를 보여주지 못 하게 하는 이 긴장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오히려 약간의 틀이나 공식 같은 게 아주 없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내가 통용되는 틀이나 공식을 아주 몰라서인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만의 틀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이리저리 시도하는 과정인걸까.
아마도 내 생각에 맨 후자가 아닐까 한다. 연기 훈련을 시작한 지 채 1년이 되지도 않았는데,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만 같은 성장의 과정을 여전히 인고해 내야 하는 것이겠지.
정답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어떤 동료나 스탭 없이 스스로 분석하고 연습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더욱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욱 집중을 하고자 한다면, 지금 필요한건 믿음, 다시말해 ‘자기 확신’이 아닐까.
‘자기 확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작품 분석을 정확히 하고, 반복해서 대사를 곱씹고 연습해 보는 수 밖에 없다.
사람들 앞에서 수많은 시선을 감당하고자 한다면,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건 그저 본인을 향한 믿음이겠지.
지금으로선 그렇게 생각한다.
그 다음, 두 번째 원인. 메소드 연기법으로 훈련을 하면서 캐릭터의 대사에 ‘나’를 대입하여 해내고자 했는데, 이 방법이 오히려 내게 혼란을 주었던 것 같다.
캐릭터와 내가 부분적으로는 같은 경험을 했겠지만, 어떻게 그 대사에 완벽하게 나의 상황을 대입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든 정답처럼 끼워맞추려고 했던 것 같다.
최근에 새로 연습하고 있는 독백 대사를,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되뇌이고 있는데
갑자기 몰입이 되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주위 사람들이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전과 달랐던 점은, 머릿속으로 구체적으로 공간을 설계해 내서 눈앞에 펼쳤다는 점이다.
독백대사의 공간은 피오르드가 훤히 보이는 창이 있는 거실로 짐작된다.
조그마한 창인지, 우리나라 아파트 베란다로 통하는 문처럼 큰 유리창인지,
벽이나 바닥은 어떤지, 현관문은 어디에 있는지,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독백대사의 주인공처럼 남편을 잃고 몇 해가 지난 상황을 생각했다.
희곡에 나온 그 부부의 역사도 충분히 인지했고, 그런 관계성을 내게 덧씌웠다.
조우진 배우님의 필모톡에서 들었던, ‘나를 그 상황에 빠뜨리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나의 경험이나 감정을 억지로 대입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편안해 졌고, 저절로 그 캐릭터의 감정선이 불러일으켜졌다.
나는 남편이 없고, 남편을 잃은 적도 없었지만, 나는 마치 남편을 잃은 여자가 된 느낌이었다.
준비하고 있는 독백 대사를 사람들 앞에서 해 봐야 이 방향성이 맞는지 검증을 할 수 있겠지만,
어찌됐든 여태 해 오던 연습 방법과는 다르게 해 보고 있고, 어쩐지 나답게 캐릭터가 되는 과정인 것 같아서
오늘 느낀 버스정류장에서의 기분이 새롭다.
조금씩, 나아가길.
재미있게 오래토록 연기를 할 수 있기를 오늘도 희망하며 끄적인다.
이 희망을 잃지 않는 것 또한 내게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