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나여야 했던 이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단 걸 안다.
"네가 먼저 다가가보렴. 사탕이나 과자를 주면서 친해지면 괜찮을 거야."
"걔가 널 좋아해서 그래. 자격지심이라서 그런 거야."
"너.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는 했니? 이런 건 다 절차가 있어. 얼른 네 반으로 돌아가!"
"지금 네가 겪는 문제는 답이 뾰족하게 없어."
"적당히 좀 꼰질러야지. 담임 선생님 힘들게 말이야! 이 반에 그런 애가 있어."
각각 내가 2009년, 2010년에 받은 상담에서 들었던 말들이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은 담임 선생님이기도 했고, 교내에 설치된 위클래스의 상담사들이기도 했다. 열세 살 혹은 열네 살에 불과했던 나는 순진하게도 어른이라면 내가 겪고 있는 심각한 폭력의 문제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그만큼 내게 '어른'은 사건을 냉철하게 볼 줄 알고, 인과관계를 따지면 절대적으로 내 편이 돼줄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열네 살에 겪은 폭력과 폭언으로 산산조각 나고야 말았지만.
학교에선 어른도, 아이도 가해자였다. 등에 슬리퍼 자국이 선명하게 찍힐 정도로 걷어 차인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은 사물함과 책상에 고이 있어야 할 교과서가 바닥에 마구 내팽개져 있었다. 책상엔 온갖 모욕적인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눈앞에서 남녀의 교접을 의미하는 성희롱을 받은 적도 있었다. 샤워를 하루에 한 번씩 하는데도 더럽다고 매일 손가락질받았다. 가방에는 쓰레기가 구겨져서 담겨 있었고, 어쩌다 하굣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지나가는 행인이 당황스러워할 정도로 육두문자와 폭언을 내뱉었다. 책상에 엎드리면서 울고 있으며 책상이 걷어차였다.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쟤가 소문의 걔야?' 라며 되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내가 교실 카르텔에서 가장 최하위라는 것을.
괴롭힘이 시작된 6학년 때와 절정이었던 중학교 1학년. 주로 나를 괴롭혔던 대상은 남자아이들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주로 방관했으며, 나를 도와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나를 보면서 내가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아빠가 경찰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반 친구가 내게 접근하는 걸 막기도 했었다.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학교의 어른인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학교폭력을 당할 때마다 구조 요청을 하는 걸 귀찮아하거나 학교의 부적응자쯤으로 낙인을 찍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신경성 위염을 얻었을 때쯤. 또다시 교과서가 찢긴 채로 교실 바닥에 나뒹구는 걸 보았다. 결국, 나는 5교시 수업을 빠지고 학생부실(지금도 이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다.)에 도움을 요청했다. 어리고 소심한 내가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상위기관으로 생각해 낸 게 그곳이었다.
안에는 머리카락이 반쯤 벗겨진 인자해 보이는 50대 남자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울지 않으려 애쓰는 나를 침착하게 앉히고, 경위서를 적어달라고 펜을 쥐어주었다. 경위서를 적으면서 당했던 걸 적으니 내가 정말로 피해를 받았단 걸 순순히 인정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코를 훌쩍거리면서 경위서를 써 내려가던 중, 파마머리에 덩치가 큰 선생님이 들어왔다.
"너. 담임 선생님께 말하고 수업 빠지고 여기에 온 거야?"
"네? 아시긴 아시는데 수업 빠진 건 모르세요..."
"이런 건 다 절차가 있어. 수업 째지 말고 얼른 네 반으로 돌아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그렇게 그 '절차'에 따라서 학교에 설치된 위클래스에 인계가 됐다. 위협적으로 큰 목소리에 놀라고, 내쫓겨났다는 사실에 나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위클래스에 있던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면서 적잖게 당황한 건지 휴지를 먼저 건네주었다. 나는 경위서에 적었던 대로 내가 받은 피해를 고스란히 전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지금 네가 겪는 문제는 답이 뾰족하게 없어."
어른은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깨진 순간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당시 학교폭력대책위원회를 여는 건 정말로 큰 일이었다. 그러니 학교는 대책위원회를 여는 걸 꺼려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내가 교실로 돌아오고 괜찮냐,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경찰서에 간 거냐?'라고 두려움과 흥미가 섞인 시선으로 물었다. 나는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폭력은 다시 시작 됐고, 나는 철저한 외면과 방관 속에서 숨을 죽인 채로 중학교 생활을 보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교통사고가 나서 차에 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빈 집으로 돌아와 오열하기도 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을 태워질 것만 같은 탄식 속에서, 그 고통을 벗어날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의심하게 된 계기도 이 기억이 머릿속에 단단히 뿌리내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때도 나는 나를 놓지 않았다. 제일 소중한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어린 나는 언젠가 내가 그들에게 복수해 주길 바랐다. 나는 지금도 그 조그맣던 아이와 나눴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다만, 사랑만이 영혼이 찢겨진 채로 죽어가던 나를 살렸다는 걸 몰랐겠지만.
내가 살아서 작가가 되고 글을 적는 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