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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Jan 03. 2019

모모 카레

원칙에 입각한 삶이란...

지금부터 17년 전쯤 난 이곳 캘거리에서 처음으로 식당을 열었다.   경험은 고사하고 사전 지식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의 오픈이었다.   몇몇 지인들이 오픈 기념으로 찾아준 이외에는 처음 몇 달간은 하루 종일 파리만 날리고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손님이 들어와도 주방은 물론 홀서빙에서도 미숙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그리던 내 사업의 그림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하며 텅 빈 테이블에 쭈그리고 앉아 신세 탓을 하고 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중 아내가 일본인 바자회에서 우연히 알게 됐다면서 여자 한 분을 데리고 가게로 들어왔다.   모모이 지하루 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일본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캐나다에 와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영어는 모자라지만 일본에서 홀 서비스 경험이 많다고 했다.   영어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자기소개를 들은 후 사실 처음에는 많이 난감했었다.   내가 느끼는 일본 사람들의 전형적인 악센트와 문법구조가 그녀의 영어에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그리고 물론 내가 외모를 따질 군번은 아니었지만 예쁘지도 그렇다고 귀엽지도 않은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한번 보면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모모’라고 부르라는 그녀는 아내와 거의 얘기를 끝내고 온 모양이라 순조롭게 우리 가게의 홀 서빙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모모와의 기나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모모는 입사(?) 첫날부터 가게의 얼굴이 되었다.   모모는 철부지도 아니고 방랑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우리 가게를 손님을 맞는 식당 같은 식당으로 바꾸어 갔다.   그녀의 접객은 백 퍼센트 손님의 입장이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왕 이란 말이 있다면 일본에서 손님은 신이다.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돈을 내고 나갈 때까지 완벽하게 손님의 만족도를 높여갔다.   음식의 맛은 몰라도 적어도 서비스에 있어서는 별 다섯 개는 모자란 평가였다.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이 조금이라도 다른 모양 이거나 모자라거나 하면 음식 서브를 거부하기도 하여 사장인 나와도 여러 번 얼굴을 붉힌 기억도 있다.   그렇게 서서히 손님들이 늘고 모모의 인상과 스타일은 우리 가게의 인상과 스타일이 되어갔다.   


바쁜 런치 시간이 끝나면 남은 재료로 주방에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종업원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한다.   유일하게 동료애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는 자리이다.   대부분의 경우 음식은 사장인 나나 주방보조가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가끔은 홀 종업원들도 주방에 들어와 간단한 음식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루는 모모가 카레를 만들겠다고 주방에 들어왔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남이 해주는 음식이 최고로 맛있다고 할 것이다.   제아무리 최상의 재료로 조리된 음식이라도 그것이 내가 만든 음식이라면 편안하게 즐기기는 힘들다.   하지만 남이 만들어 주는 것은 그것이 토스트나 라면 일지라도 맛있게 감사하게 먹게 된다.


양파를 볶기 시작한 모모는 좀처럼 다른 공정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카레란 단순히 재료 넣고 끓이다가 카레 루를 넣고 마무리하는 지극히 단순한 요리였다.   하지만 모모는 양파가 완전히 갈색으로 끈적해질 때까지 오랜 시간 약불에 볶고 있었다.   그다음 순서는 여느 카레와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재료를 빠르게 볶다가 물을 붓고 그 안에 캐러멜화 된 양파를 넣었다.   거품을 제거하며 재료가 충분히 익혀지면 불을 끄고 카레 루를 넣고 커피가루와 버터를 조금 넣어 마무리했다.   


그날 내가 먹은 카레는 그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만난 카레 중 최고의 카레였다.   무엇보다도 남이 만들어 준 음식이라 큰 점수를 따고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성스레 볶은 양파가 카레의 절대적인 맛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날 이후 모모가 만드는 카레는 마치 소울푸드처럼 지치고 피곤할 때는 먹고 싶어 지는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분명치 않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가게의 스페셜 메뉴로 모모의 카레를 선보였다.   물론 그때부터는 주방 팀이 카레를 대량으로 만들었지만 모모의 레시피를 변형하지는 않았다.   모모 덕분에 신선하게 접하게 된 음식인 만큼 가게의 스페셜 메뉴는 그냥 그대로 “모모 카레”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지금 운영 중인 해산물 식당에서도 모모 카레의 레시피를 그대로 지키며 해산물 카레를 선보이고 있다.   


비록 지금 그녀는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모모와의 인연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동안 이곳에서 결혼도 했었고 또 이혼도 했었고 불법체류에 연루되어 추방도 되었었고 다시 돌아와 영주권도 받았고 여전히 웨이트리스를 본업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개인적인 우여곡절을 많이 겪어낸 그녀이지만 모모는 자기만의 원칙을 세우고 살고 있고 난 그런 그녀가 참 보기 좋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와 술자리를 함께 할 때는 현재 일하는 가게에서도 옛날에 우리 가게에서 했던 것처럼 손님들을 위해 간혹 주방 사람들과 싸우는 일들을 안주 삼아 얘기한다.   또한 지금 그녀가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과거의 어떤 좋지 않았던 경험도 개입하지 않고 철저하게 현재 진행형에 입각해 있다.


자신이 납득이 갈만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약한 불에 천천히 양파를 볶아내는 원칙이... 돈을 지불하면서 음식 서비스를 받으러 온 손님들이 최상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 상식이... 현재 좋아하는 것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몰입이...  아름답게 비추어지는 세상이면 좋겠다.   모모 카레의 깊은 맛이 오래오래 유지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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