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제주
한여름 뜨거운 태양아래, 꼭 가고싶다..라기 보다는 이번에는 꼭 가봐야겠다..라는 마음으로 가파도행 배에 오른다. 처음 가는 섬에 대한 설레임보다는 하루종일 피할 곳 없이 쏟아져내릴 태양빛에 걱정부터 앞선다. 모슬포항에서 한 십여분 뱃길이면 가파도에 닿는다. 묵고 있는 숙소에 창을 통해서도 보이는 가파도. 바다에 납죽 엎드린 섬이 거친 파도라도 밀려오면 그대로 덮여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배에서 내리니 가장 기대했었던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뷰가 한 앵글에 쏘옥 들어온다. 이거지~~ 이모습을 보려고 가파도에 온 거지. 무언가에 홀린듯 이 세개의 산만을 응시하며 가파도 해안길을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니 화려한 오렌지빛의 무언가가 널리 퍼져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무얼까? 청보리가 아름다운 가파도는 들어봤어도 오렌지빛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렌지빛 그 강렬함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기에 원럐 계획했던 방향이 아닌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꽃이었다. 그것도 코스모스였다. 그런데 오렌지빛이라니! 수줍은 듯 살포시 고개를 숙이고 살랑살랑 일렁이는 바람에도 흔들리고 마는 하늘하늘한 코스모스가 아니라 진정한 다홍빛을 내뿜으며 작열하는 태양빛에도 결코 지지 않는 강인해보이는 코스모스가 가파도를 뒤덮고 있었다. 바다 건너 보이는 한라산도, 산방산도, 송악산도....오렌지빛 코스모스에는 기가 죽어 보였다. 마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듯 신이 났다. 사진을 찍는 손과 이쁜 각도를 찾으려는 눈이 바쁘게 움직인다. 정말이지 아름답구나! 파란 하늘과 바다가 바로 옆이고 뒷 배경으로 제주의 멋진 산들을 두르고 있으니 오렌지빛 코스모스 들판이 더욱 더 멋져 보였다.
황화코스모스. Yellow Cosmos나 Orange Cosmos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7,8월에 꽃을 피우는 멕시코가 원산지인 1년초 꽃이다. 샛노랑에서 다홍색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꽃 색깔을 자랑하는 황화 코스모스는 수분은 충분치 않아도 되지만 풍부한 일조량은 필수라는 사실. 역시 그늘 한점 허락하지 않는 가파도가 황화 코스모스가 살아가기에는 딱인듯했다. 꽃말은 신기하게도 '넘치는 야성미'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리여리 코스모스의 꽃말이 '순정'인것에 비하면 같은 자매인데도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색감이 주는 이미지의 마법인듯하다.
당신이 가파도에 가야하는 이유
가파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섬이 거의 평지라는 사실이다. 해발 20미터가 최고 높이라고 하니 정말 평지중의 평지인 섬이다.오르락 내리락 할 일이 없으니 걷기가 더 즐겁다. 제주도의 부속섬으로는 4번째로 큰 섬이며 바다를 헤엄치는 가오리 모양을 닮아 있다. 제주 올레길에도 포함되어 있고 섬 전체 둘러보는데에 두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마라도보다 훨씬 육지에 가까워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등이 아름답게 조망된다. 봄에는 청보리밭, 여름에는 황화코스모스가 만발하는 아름다운 섬이다.
마라도가 좀 더 멀리 떨어져있고 좀 더 관광객들이 많은 관광객 위주의 섬이라면 가파도는 좀 더 일상에 가깝다. 가파도의 중앙을 가로질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가파초등학교를 만날 수 있다. 학생수 8명인 초등학교는 매년 한명씩 졸업생을 배출한다고 한다.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이 아니라 잔디가 깔려 있는 운동장이다. 1922년 가파신유의숙으로 개교하였다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곳. 운동장 한 켠에 가파도 출신으로 삼일 운동을 하고 이 학교를 세웠다는 김성숙 선생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회을공원도 키 높은 야자나무로 인해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깨끗하고 아답하고 정겹다.
가파초등학교를 지나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벌써 반대편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벌써 끝인가? 양 옆에는 가파도 보건소, 가파도 119, 카페, 공방, 레스토랑 등등이 귀엽게 위치해 있다. 모든 곳들의 미니 버전처럼 말이다. 그리고 가파도의 역사와 현재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이 벽화 형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설렁 설렁 읽어내려가면 가파도가 어떤 곳인지 금세 알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가파도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황화코스모스도 이뻤지만, 이 길 또한 참 매력이 있었다. 바다가 보여 곧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아쉽고 소중했다. 흑우, 자리, 방어, 멜의 본고장, 가파도. 가파도는 맛있는 곳.
길을 걸어가며 무언가 굉장히 깨끗하고 깔끔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가파도는 2012년부터 '탄소 없는 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한다. 풍력과 태양광 패널을 이용하여 전기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풍력 발전기와 태양광 패널, 전기 자동차들이 자주 보였다.
하멜이 가파도 암초에 걸려 파선하여 가파도에 선착한곳에 하멜등대를 세웠다고 한다. 왼쪽 빨간 등대가 하멜등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이자 서기였던 하멜이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인근에서 폭풍을 만나 죄초한 후 조선에 14년간 억류되었다. 17세기. 참으로 까마득한 옛날에 가파도 땅을 밟았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가파도에는 자전거를 빌려 섬을 일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좀 더 선선한 계절이라면 자전거도 나쁘지 않겠지만 한여름에는 그 뜨거운 태양열을 오롯이 받을 생각을 하니...자전거 쪽은 아예 쳐다보지를 않았다. 두 다리로도 충분히 기진맥진 하지 않고 돌아 다닐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섬이 맘에 들었다. 하멜 등대 쪽으로 가다보면 무인카페가 나온다. 잠시 쉬어가도 좋은 곳. 하지만 가파도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은 바로 아래 사진에 있는 정자 같은 곳이다. 지붕이 있어 그늘을 만들어 주고 바로 옆으로 바다와 오렌지빛 코스모스가 만발한 들판이 있다. 벤치에 누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한다면 한 여름이라도 시원하게 힐링할 수 있다. 정말 정말 강추 핫스팟!
운진항으로 돌아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선착장 근처 슈퍼에는 청보리 미숫가루, 청보리 아이스크림 등을 팔고 있었다. 잠시 땀을 식히고 돌아가 준비를 한다. 도착할때는 몰랐는데 가파도 선착장에는 양산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었다. 정말 양산이 필요할만큼 뜨겁고 그늘 한점 없이 아름다운 힐링 섬, 가파도. 청보기가 일렁이는 계절에 꼭 다시오고 싶다.
여행메모:
1. 대정읍 숙소에서 가파도 왕복배편 30프로 할인권을 주었는데 아주 쏠쏠하다.
2. 운진항에서 왕복 표를 사면 돌아나오는 시간이 정해진다. 한 1시간 40분 간격인데...연장하고 싶다면 가파도에 도착해 운진항에 전화해서 연장하면 된다. 1시간 40분은 가파도를 즐기기에 짧다!!
3. 가파도 선착장에 양산 대여, 자전거 대여를 할 수 있다. 당
4. 식당, 카페, 슈퍼 등 다 있는데 마라도처럼 편의점은 없다. 편의점이라 불리우는 곳은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파는 슈퍼와 비슷한 곳이었다.
5. 운진항 주차장은 넓다. 혹시 운진항에서 맛있는 집을 찾는다면 '하모리밥'을 추천.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있지만 걸어갈 수 있다. (메뉴는 푸팟퐁커리, 돈카스 등인데...맛있다. 양이 무지무지 많다!)
6. 항상 신분증 지참할 것! 당연하지만 마스크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