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제주
나는 일출보다는 일몰을 좋아한다. 일몰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일출을 보기에는 너무 올빼미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은 살면서 한번쯤은 꼭 보고 싶었다. 제주도 갈 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던, 아니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성산일출봉 일출보기' 미션을 이번에 성공했다. 여름이라 해가 더욱 일찍 떠 올라 일출을 만나는 일은 거의 고통에 가깝다. 자기 전에는 꼭 봐야지 싶다가도 새벽이 되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일어나서 봐야만 할까...라는 회의가 드는, 나에게는 엄청 힘든 일. 어스름한 새벽에 광치기 해변으로 향한다. 광치기 해변은 성산일출봉 옆모습이 오롯이 보이는 곳으로 일출을 배경으로 성산일출봉의 실루엣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만약에 태양이 성산일출봉 옆으로 얼굴을 내밀어 준다면 정말 금상첨화인 곳이다. 길가 아늑한 곳에 주차를 하고 캠핑의자를 꺼내 해변으로 향한다. 벌써 하늘이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슴이 뛰는 풍경이다.
광치기 해변에서 나름 가장 명당 자리로 보이는 곳에 의자를 펼치고 일출을 감상한다. 성산일출봉이 태양을 등에 업고 새까맣게 서 있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태양은 점점 더 강렬한 붉은 빛을 토해낸다. 깊지 않을 것 같은 광치기 해변 앞바다가 덩달아 붉게 물들어 간다. 광치기 해변은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섭지코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데 일단 모래가 검은 색이다. 다른 해변들이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가 많다면 이곳은 판판하고 맨들한 표면을 가진 너른 바위들이 해안에 펼쳐져 있었다. 펄펄 끓던 용암이 바다와 만나면서 생긴 지형이라고 한다. 이 검고 판판한 바위같은 곳이 이끼로 뒤덮여 있어 발을 디디려고 하니 미끄덩거렸다. 서 있기 불가능한 곳이 많아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가며 일출을 눈 안에 담아본다.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한 광치기 해변에서의 일출 감상은 오직 세가지 색감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검은 색과 붉은 색, 그리고 푸르스름한 색. 동해바다에서의 일출과 다른 점은 성산일출봉이 앞을 딱 가로 막고 있어 태양이 바다 전체를 붉게 물들이지 못한다. 일출봉을 피해 달아난 빛이 검은 빛 광치기 해변 앞바다를 힘겹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렇지 못한 곳은 여전히 새까맣다. 떠오르는 태양이 밝아질수록 더욱더 검게 변해가는 성산일출봉. 시뻘건 불덩이를 등에 지고 인내하는 모습이다. 가만히 보니 떠오르는 태양이 내뱉은 불덩이가 서서히 움직이는 듯 했다. 어느 순간 그 불덩이가 성산일출봉 한가운데로 쏙 들어가버린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붉은 불길이 올라온다. 진짜 화산폭발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너무 아름답다! 진짜였더라면 뜨거워도 너무 뜨거웠을 장면. 매일 아침마다 이런 장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니...그저 놀라울 뿐이다.
사실 일출봉의 한쪽 옆으로 태양이 쏘옥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간 날은 날이 흐려서인지 정확히 태양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샛노란 아우라를 뿜어내는 곳 어딘가에 태양이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동그란 태양을 만나는건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사실 성산일출봉에서 섭지코지에 이르는 곳은 하나의 커다란 지질공원이라 할 수 있다. 제주도의 다른 오름들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바다에서 마그마를 분출한 성산일출봉은 원래는 우도나 비양도처럼 섬이었으나 모래와 자갈 등이 쌓여 간조때는 육지와 연결이 되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40년에 이르러 육지와 연결되는 도로를 놓음으로 완전히 육지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성산일출봉에서 육지로 연결되는 다리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가오리의 꼬리처럼 가늘게 쏘옥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길이 광치기 해변을 지나 섭지코지로 연결되는데 이 곳들이 모두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있으면서도 여행객에게는 경이로운 풍경을 선물해주고 있다.
광치기 해변에서의 일출 감상이 끝났다면 이제는 진짜 성산일출봉을 올라야 할 시간. 제주도에 올 때마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올랐던 성산일출봉이다.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면 정상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올라가는 것이다. 빨리 올라가서 오래 앉아서 풍경을 감상하는 것. 늘 정상에서의 시간은 빠듯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려면 이 방법이 좋다. 같이 올라가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정상에서의 시간은 짧아진다는 것을 여러차례 오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올라가는 길에는 다양한 기암괴석들이 구구절절 사연을 가지고 서 있었다. 흐르는 땀을 식으며 한숨을 돌리고 또 올라가다 보면 금세 정상이다. 해가 뜬 직후라 참을 만 했으나 한 여름 태양의 기운은 정말 대단했다.
성산일출봉 정상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다. 우리나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분화구를 울룩불룩 바위와 초록들이 감싸고 있고 그 너머로는 망망대해 짙푸른 바다가 배경이다. 분화구안에는 나무와 풀들이 가득한데 사람들이 들어간 적이 없는 곳이니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을지 정말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다. 보통의 화산 분화구 지형들은 흙과 돌 등 화산쇄설물들이 쌓여 있고 황량하여 무서운 느낌도 드는데 반해 성산일출봉은 초록이 무성하니 마치 초원처럼 느껴져 뛰어들어가 달리고 싶을 정도로 친근하다. 성산일출봉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진을 보면 정말 정말 아름답다. 살짝 오목한 초록 그릇처럼 바다위에 떠 있는 모습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장관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내려오는 길에 저 멀리 바라다보니 아직 고요하기만 한 성산리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모처럼 일찍 일어나 광치기 해변에서 일출도 보고 성산일출봉까지 올라오니 하루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루를 모두 살아버린 느낌이다. 다음에도 이 모습 이대로 다시 성산일출봉을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여행메모:
1. 광치기 해변 갓길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돌아올때 보니 그냥 도로 갓길에 주차한 차들이 많았다.
2. 시간 여유가 있다면 캠핑의자에 앉아서 일출 감상하는 것도 좋을듯.
3. 10월~2월: 07:30~19:00 (매표 마감 17:50) / 3월~9월: 07:00~20:00 (매표 마감 19:00), 매월 첫번째 월요일 휴관(단, 등하산교차로, 우뭇개 전망대, 우뭇개 해안은 무료개방)
4. 성인 입장료는 5,000원이나 7시전에는 무료로 올라갈 수 있다.
5. 새벽 일찍 어두운 시간에는 들개가 출몰하기도 한다고 하니 주의할 것.
6. 해가 뜬 순간부터 선그라스가 필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