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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Feb 05. 2024

호랑이에 물려가도 비법노트만 있으면 산다

선배 봉사자들 없이 보낸 떨렸던 시간

도서관 봉사 당일 연이은 카톡이 울렸다.


[제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봉사를 하루 쉬어야겠습니다.]

[저도 몸살감기라서 힘들겠어요 미안해요.]


이런 청청벽력 같은 소식이 또 있을까. 선배 봉사자들이 연달아 불참 소식을 전했다. 일단 몸이 얼른 회복되길 바란다는 답변을 보냈다. 봉사 한지 고작 한 달이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 같은데 소총 하나 달랑 들고 전장에 처음 나간 군인 마냥 불안이 엄습해 왔다.


왜 슬픔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근무 교대를 하고 난 후 도서관 시스템에 접속하자마자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헐레벌떡 도서관 문을 열고 다가왔다. 그리곤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엄마가 이 종이 주면서 책 찾아오라 하셨어요."

"회원증 먼저 주세요."

"회원증 없는데요. 이상하네. 종이만 주면 된다고 했는데...."


'가만있자. 회원증 없이 책을 빌려 줄 수 있나?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전화로 물어불 수도 없고 어찌할꼬.' 1~2초의 그 짧은 순간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불현듯 지난번 봉사 때 들었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예약도서였다. 비법노트를 꺼내 적은 내용을 찾아보니 분명 있었다.

예약도서는 이렇게 종이가 붙여있다

서둘러 뒤에 있던 책장을 뒤적거리니 여학생이 말한 예약도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오, 주여. 책을 건네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뒤로 비법노트에 적어둔 내용들을 읽고 또 읽었다.

나의 깜찍한 비법노트

우선 반납한 책을 제자리에 놓고, 상호대차 소장분관처리에 돌입했다. 노트에 적힌 내용대로 하나씩 차근히 해보았다. 보낼 책을 찾아야 하기에 의자에 엉덩이만 떼면 책을 빌리거나 반납하려는 사람들이 수시로 나타났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1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야 간신히 여유가 생겼다.


속도가 생명인데 여전히 더뎠다. 더듬더듬 간신히 책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띠지를 꺼내 붙이고 보낼 곳과 신청자를 적은 후 가방 안에 넣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려나 싶더니 저 멀리 육아책 코너에서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가와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 손에는 책 목록이 담겨있는 코팅된 파일이 들려있었다. 회원증을 꺼내고 파일 안에 있는 책을 찾아 달라고 했다.


'아니 이건 또 뭐지? 전혀 들은 바가 없는데.' 아무리 녹슨 머리에 기름칠을 해보아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버벅대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서주었다.


"이건 영상카드예요. 선생님 뒤에 보시면 카드가 있을 거예요. 제가 빌리려는 건 52번이니 찾아주세요."


고개를 돌려 왼편 구석을 보니, 정말 카드가 있었다. 49, 50, 51, 52이 찾았다! 정중앙에 박힌 바코드를 찍어서 주는데 나도 모르게 "고맙습니다."란 말이 나왔다. 어머니는 머쓱해하며 아이 손을 잡고 돌아갔다. 그 뒤로도 연달아 카드를 빌리러 왔는데 만면의 미소를 띠며 꺼내 주었다. 얼른 비법노트에 영상카드 관련 내용을 적었다.

번호별로 정리가 되어있는 영상카드

어느새 시간이 흘쩍 지났고, 하나 둘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텅 빈 공간이 주는 적막감이 흘렀다. 이제 남은 일은 내 구역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때 눈과 같은 위치에 놓인 글 받침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봉사자 누군가가 적어 놓았을 그 안엔 서가 배하는 구체적인 팁이 예시까지 보여주며 깨알같이 담겨 있었다.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찍었다.

알기쉽게 예시까지 적혀있는 책정리 비법

내용을 숙지하고 정리하니 한결 시간이 단축되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해. 책장 정리를 마치고, 아직 남아있는 이용자들에게 종료를 알리고 흐트러진 공간을 원위치했다. 다시 한번 구석구석 살핀 후 불을 끄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호랑이에 물려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더니 무사히 봉사를 마쳤다. 아마도 선배 봉사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도움으로 오늘일은 처리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리라. 예약도서의 위치, 영상카드의 존재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봉사자로서 훌쩍 성장했다는 혼자만의 착각마저 들었다는. 물현실은 배워야 할 일이 한가득이지만 착각은 자유이니.

모두가 떠난 텅빈 도서관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에,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렇게 천천히 멀어졌다.






#라라크루, #라라크루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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