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일 죽는다면

죽음이 주는 삶의 방향

by 빛길


유년기의 나는 잠 때문에 어른들을 보채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어른들 없이도 제법 의젓하게 잠이 들었고 잠귀가 어두워 중간에 잠을 깨는 일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울며 잠에서 깬 악몽의 기억이 딱 두 번 있는데 첫 번째 악몽은 산에서 길을 걷다가 내 눈앞에 거미가 나타난 꿈이고 두 번째 악몽은 부모님의 장례식에 대한 꿈이었다. 불과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어디서 장례식 풍경을 봤는지, 왜 하필 그 장례식에 엄마와 아빠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의 나로서는 꿈속의 장면이 꽤나 충격적인 터라 잠에서 깨자마자 울면서 엄마한테 달려갔던 것이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린 나는 혹시 나의 꿈에 엄마마저 놀랄까 봐 엄마가 어떤 악몽을 꾸었냐고 물어보았을 때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엄마가 죽는 꿈을 꿨어.

그러나 나의 말에 엄마는 생각보다 차분했고 피식 웃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야. 엄마도 아빠도 언젠가는 죽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금의 내가 너무 많은 생각과 걱정을 하듯, 유년기의 나 역시 걱정이 참 많았는데 그 꿈을 꾼 후 한동안은 죽음에 대해 걱정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언젠가 있을 나의 죽음에 대해.(물론 철학적인 걱정이라기 보다 단순히 '내가 죽으면 어떡하지? 어떻게 되는 거지? 무서워!'라는 생각에 가까웠지만.)
이후 내가 청소년기에 접어든 후로는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때가 많아졌다. 어느 날 도서관에 갔다가 별생각 없이 <죽기 전 꼭 해야 할 일 101가지>라는 책을 빌려 읽었는데 같은 반 친구가 내 책상 위에 그 책이 놓인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뭐 이런 책을 읽냐?"라는 말을 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당시 그 친구는 죽음을 우리에게서 먼, 불길하고 무서운 어떤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그래서 책 표지에 적혀 있던 '해야 할 일'보다 '죽기 전'이라는 단어를 더 주목해 본 것은 아닐 지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내게 '인생은 귀하고 가치 있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았고 그런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조언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어른들이 말하는 '잘 산다'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맹목적이고 교과서적으로 대학교에 들어왔다. 그러나 대학교에 와서 본 세상은 그동안 어른들에게 배웠던 것과 많이 달랐다. 둘 사이에 괴리가 나타날 때마다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리고 '죽음'보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 더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죽음과 삶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후 자꾸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내가 당장 내일 죽는다면?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매번 '억울할 것 같다.'라는 답을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해보지 못한 것이 너무 많고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참아온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가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이 삶에 대한 태도나 방향을 바꾸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면서도 오늘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매년 만들었던 버킷 리스트. 그중에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미루었나 생각해보면 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공부', '대외활동'같은 목록은 늘 우선순위고 '여행', '뮤지컬 관람'같은 목록은 늘 뒤로 미루다 결국 이루지 못하는 때도 많다. 과연 '영어 공부'가 진짜 버킷리스트라고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영어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것과 여행을 가다가 죽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할 텐데 말이다. 내가 삶에 지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과감함의 결핍'이 어느 정도의 이유를 차지하는 것 같다.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이 후회 없을 삶을 살고 싶다. 다시 한번 버킷 리스트를 다시 점검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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