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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무한도전>을 굳이 논할 필요가 있는 건

by 그냥저냥 ㅏ랑 Ma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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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20년 영상비평지 《마테리알 3호에 처음 발표됐던 글의 개정판이다. 이는 나의 첫 비평집인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에 실렸으며, 다가오는 〈무한도전〉 방영 20주년(4월 23일)름대로 념하고자 본 블로그에 게재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금 시점에선 동의할 수 없거나 민망해지는 몇몇 세부가 눈에 밟히긴 하나, 글에 새겨진 시간의 자국을 유존하는 일도 필요하단 생각에 오탈자와 몇몇 오기만 수정 게재한다. 여담이지만 본 블로그에도 게재되어있는 「즐겁게 일그러지는 영혼 - 〈가짜사나이〉와 〈대탈출〉 사이의 진정성은 이 글의 프롤로그 격으로 쓰여진 것이다. 또한 이 글을 집필한 후기가 궁금하다면 이 포스트를 읽어보시라)





〈돈 키호테〉中

심상찮은 일일까? TV 예능 프로그램 〈돈 키호테〉, 〈플레이어〉, 〈끼리끼리〉 등을 조금씩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 혼자만의 의문인가 싶어 해당 프로그램들에 대한 반응들을 살펴봤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들에서 〈무한도전〉적인 것을 발견한 건 역시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저 프로그램들의 형식, 그러니까 터무니없고 기괴한 일에 도전하거나, 고정된 멤버들을 매번 완전히 다른 극적 상황에 떨어뜨리는 (비)형식이 우리에게 〈무한도전〉의 시그니처로 각인된 지는 너무도 오래됐다. 거기다 〈끼리끼리〉의 멤버인 박명수와 황광희는 〈무한도전〉 출신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반 시청자들보다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제작자들이 이를 의식하지 않고 촬영에 들어갔을 리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돈 키호테〉의 PD인 손창우는 한 인터뷰에서 "절대 똑같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없"다며 소극적으로 〈무한도전〉과의 유사성을 인정했다) 〈무한도전〉이 종영하고 얼마 안 되어 누가 봐도 〈무한도전〉스러운 프로그램들이 연달아 출몰한 게 그저 우연일까? 또 이건 심상찮은 일일까? 이 글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여러 부침 끝에 2018년 〈무한도전〉이 (사실상) 종영했을 때 우리의 발에는 〈무한도전〉적인 것, 보다 정확히는 〈무한도전〉이 상징하게 된 이데올로기의 유효 기간이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상식적' 진단들이 마구잡이로 채였다. 어떤 이데올로기? (광범위한 인기는 물론 아젠다의 형성에도 영향을 행사하는) '국민 예능'의 가능성, ('공식' 연예인들을 핵심으로 구동되는) 스타 시스템, (폭력적 태도를 근간으로 삼는) 남성 호모 소셜의 웃음 코드... 하지만 이런 진단은 사실 발화자의 기대일 뿐이란 걸, 예컨대 인기 인터넷 방송인인 브베와 보겸이 이런저런 마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활동하고 있는 주위를 잠깐만 둘러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한도전〉의 종영은 (가치 판단과 결부된) 좁은 의미에서의 '새로움'의 기점이 아니다. 만약 무언가가 정말 끝났다면 그건 이데올로기의 유효 기간이 아니라, 정반대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지막 봉인이었을 게다.


이를테면 쇼트 비디오 SNS인 바인(Vine)과 틱톡(TikTok)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2017년 쉬운 편집 방식과 시간제한이라는 형식으로 비디오 밈 생태계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바인이 그 자신의 형식, 정확히는 그 형식을 따라하고 가공하고 발전시킨 다른 SNS들에 의해 특수성을 잃고 결국 서비스를 종료했을 때, 다양하고도 간편한 편집 효과를 내세우며 '바인 이후'의 SNS 중 가장 위세를 떨치던 틱톡이 본격적인 글로벌 런칭을 시작했다. 이를 두고 '바인적인 것'이 끝장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불과 몇 개월 차이라는 이 절묘한 타이밍은 원류에 대한 형식의 자율성의 '비극적'인 사례로 우리에게 던져진다. 그 어떤 형식도 세간의 영역으로 떨어지는 순간 복제되고 산산조각이 나 원류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는 원류를 덮칠 잠재성을 갖게 된다는 '비극'. 이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원류의 붕괴란, 이미 실상 껍데기만 남은 원류에 상상적으로나마 봉인되어있던 형식이 마침내 완전히 풀려나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바인이 개발한 형식이 더 이상 바인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이런 사태는 이미 필연이 되었을 터.


 〈무한도전〉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 '이후'의 초인기 예능 프로그램들(가까이로는 〈1박 2일〉 시즌 1, 멀리로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 사이에서도 나름의 인기와 영향력을 유지하던 때와는 달리 멤버들의 나이 듦 및 제작진의 변화 속에서 프로그램의 스타일 및 플롯이 '노후화'되고 식상해져 —이 결정적인 원인을 인터넷 여초 커뮤니티의 '프로불편러'들 탓으로 돌리는 이들의 비열함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 내포된 이데올로기들과 자신이 만든 형식들을 독창적·독점적으로 상징화할 힘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무한도전〉은 종영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한국 예능계에서 〈무한도전〉적인 것의 끝이 아니라 〈무한도전〉적인 것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존속을 상징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돈 키호테〉를 비롯해 누가 봐도 〈무한도전〉스러운 프로그램들의 잇따른 출몰은 존속의 사례라 할 수 있는가? 아니, 그건 또 아니다. 꼭 해당 프로그램들이 흥행에 실패하고 결국 폐지 수순을 밟았기에 하는 말은 아니고, 단지 〈무한도전〉적인 것의 일부를 그 자체로 인기 요인으로 오해하고선 (차이 없는) 반복만 했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적인 것의 마지막 봉인이 풀린 것에 다소 기회주의적으로, 성급하게 대응했달까? 차라리 2019년에서 2020년은 〈무한도전〉의 (비)형식이 2020년대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쓰일 수 있는지가 검토된 과도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증상일 수는 있어도 심상찮은 일까지는 아닌. 곧바로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무한도전〉적인 것은 어떻게 존속하고 있나? 말을 조금 바꾸는 게 더 적확할지 모르겠다. 〈무한도전〉은 한국의 예능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79회 '대체 에너지 특집'의 '커피프린스 2호점' 코너 中

〈무한도전〉의 성취로 언급되는 몇 가지를 나열해보자. 철저한 무의미성의 유희(로의 회귀), "고정된 멤버들을 매번 완전히 다른 극적 상황에 떨어뜨리는" 급진적인 유동성, 특유의 자막과 편집으로 대표되는 메타 개그, 인터넷 대안 문화 코드의 적극적인 활용, 장기 프로젝트나 레이스·추격전 같은 '큰' 포맷의 정립. 하지만 이들 자체는 〈무한도전〉이란 거대한 부피의 프로그램을 이루는 일부 형식이지 그것을 관장하고 또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현시되는 논리는 아니다. 가령 〈무한도전〉의 핵심을 무의미성의 유희로 규정하며 공익에 몰두하게 된 후기 〈무한도전〉을 두고 '이젠 지나치게 어른이 되어버렸다'며 아쉬워하는 견해가 있다. 하나 이는 자신이 하나의 텍스트에서 좋아하는 일부 형식만을 분리하고선 그게 텍스트의 전체라고 우기는 상투적인 생떼일 뿐, 후기 〈무한도전〉의 과한 공익적 양상은 오히려 이전의 '대체 에너지 특집'이나 '일자리가 미래다 특집'에 대한 강박적이고 진부한 되풀이에 가깝다고 보는 게 정확할 테다. 하여튼, 그저 단순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앞서 나열한 〈무한도전〉의 성취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인가? 그 실마리는 예컨대 237회 '오호츠크 해 특집' 1부의 한 장면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멤버들이 한참 열차를 타고 로케이션으로 이동하던 와중 박명수가 자신이 만든 산수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는데, 그 게임이란 것이 하나같이 재미도 긴장감도 없이 지루한지라 게임을 하면 할수록 편집의 리듬이 느려지고 멤버들의 얼굴도 굳어가며, 그에 맞춰 “지루…"라는 큰 자막이 뜬다. 이런 게임들이 계속되니 참다못한 노홍철이 정색하고서 "정말 재밌어서 하시는 거예요?"라고 박명수에게 면박을 주고, 박명수는 이런 반응에 서운한 듯 투덜거리면서 또 다른 게임을 만드는 무리수를 둔다. 그런데 이 장면이 촬영됐을 현실의 시공에선 거의 지루하게 느껴졌을 박명수의 '웃음 사망'과 무리수는 장면이라는 매개 속에서 재미를 유발한다. 재미없는 것에서 재미를 추출하기?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포착된 리얼리티의 이용이라는,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즈음부터 우리가 오랫동안 매달린 근원적 문제이다.


 여기서의 리얼리티란 충만한 충격으로 신체의 감각을 혼동시키는 '실감'이 아니다. 그것은 마름질 되지 않은 것과 마주하는 '실재'의 감각이다. 그리고 이전의 TV 예능의 체계에서 예외상태나 잉여로 여겨졌을 순간이〈무한도전〉에서는 적절한 웃음으로 변형된다. 물론 지난 시대의 영민한 학자들이 지적했듯, 어떤 단단한 상황이 갑자기 기각될 때에 대한 본능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웃음은 그 자체로 '실재'에 맞닿아있고, 서영춘이건 이주일이건 심형래건 이경규건 감자골이건 간에 지난날의 한국 TV 예능이 천착한 웃음의 영역 역시 (서로 다른 형식을 취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바로 그런 류의 것이었다.


290회 '개그학개론 2부 / 말하는 대로 1부'의 중간 오프닝. 무려 11분 동안 멤버들의 수다가 이어진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거기서 나아가 멤버들의 기나긴 수다나 지지부진한 게임 진행처럼 내러티브 경제의 측면에서라면 편집 과정에서 들어내 마땅한 순간을 적극 활용하거나, 예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정형돈의 '웃기는 것 빼곤 다 잘하는 개그맨', 길의 '무리수')를 컨셉으로 밀고 가거나, 통제에 한계를 겪을 수밖에 없는 공공장소로 나가 촬영을 진행하는 등 (그저 가이드라인으로서의) 극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예외상태적/잉여적 순간을 지속적으로, 과잉으로 이용하면서 그것이 정말 예외상태적/잉여적 순간임을 텍스트 내부에서 노골적으로 환기하는 방식으로 열심히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고 조작해 자신의 세팅에 포섭했다. ("뷁', "어쩌라고...?" 등의 특유의 자막은 그 자체로 예외상태적/잉여적이면서 또 그런 순간들을 수식하는 두 겹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외상태나 잉여를 과잉 이용한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의 기획에 입각한 통상적인 미적 시도들이 세계(의 기준)의 불가능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이를 불편하게 이용했다면 —본문의 맥락에서라면 나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뤽 고다르, 앤디 워홀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무한도전〉은 그 시도를 뒤집어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해 불가능성을 제 성립 조건으로 삼아 이를 '유희적으로' 이용했으며, 멤버들의 말과 제스처는 그 속에서 허구(-방송)적 감각과 리얼리티 둘 모두가 근원적으로 뭉뚱그려진, 불투명하고 모호한 위상을 갖게 된다. ("대본의 땔감화")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모종의 진정성을 감지한다. 연극 제작에 대한 드니 디드로의 격언 “커튼이 올라가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라.”는, 이제 그의 의도였던 '몰입'에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음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용호·노동렬 교수의 논문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자기조직화에 관한 연구: 〈1박 2일〉과 〈무한도전〉의 창의적 생산방식을 중심으로」(2010)는 본문에서 지금까지 전개했던 것과 공명하는 논지를 펼친다.  


새로운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에 ‘리얼(real)’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리얼’의 개념은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는 인간 행위의 진실성(truthfulness)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동은 비선형 과정이며 복잡한 피드백 시스템으로 이루어진다. 지극히 단순한 비선형 피드백 시스템의 역동성조차도 너무나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발생하는 사실의 인과관계를 규명하기는 어렵다. (...). 따라서 ‘리얼’이라는 단어에는 예측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불확실성(uncertainty)의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


일찍이 〈무한도전〉 '이후' 변화한 말과 제스쳐의 위상을 간파했다는 점에서 본 연구는 분명 가치가 있으나, 〈무한도전〉이 열어젖힌 문은 저자들의 언급처럼 장르로서의 '리얼 버라이어티'들에만 영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기존의 TV 예능의 체계에선 예능화 될 수 없던 '실재'를 최대한 예능화하기, 요컨대 그것이 〈무한도전〉의 논리요 〈무한도전〉이 바꾼 한국 예능의 패러다임인 게다. 혹은 역으로, 〈무한도전〉에 이르러 한국 예능에서 '실재'는 배치 방식에 따라 유연하게 이런저런 '유용한' 힘을 발산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미적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콘텐츠'라는 뭉텅이 진 개념의 한국적 판본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과도한 주장일까?)


321회 'NO 스트레th' 中

이때 중요한 건 TV 예능의 체계가 무엇을 예외상태/잉여로 규정하느냐인데, 체계의 바깥을 상정하고 그것을 확인시켜야만 거기서 이런저런 것들을 차용해 자신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간 과하게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논리. 그런데 보편이란 것이 타자와의 투쟁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양태를 끊임없이 재구축하듯, TV 예능의 체계 역시 가소적(可塑的)으로 운동한다는 운명적인 사실이 〈무한도전〉의 논리의 핵심을 건드린다. 특정한 행동이나 이미지를 예외상태로 규정하고 이용하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클리셰의 발생 빈도는 그에 비례하며 —정준하의 전 매니저 '최코디' 최종훈이 '공식' 연예인이 된 이후로는 〈무한도전〉에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무한도전〉의 급진성과 보수성을 동시에 유발한다.


〈1박 2일〉시즌1 127회 '신안 흑산도편'은 〈1박 2일〉식 슬랩스틱 게임의 진수라 할 만 하다.


보수성? 〈무한도전〉의 여러 에피소드가 슬랩스틱에 기반을 둔 게임과 콩트 위주로 진행됐음을 떠올려 보라. 말하자면 최소한의 우회 장치이자 담보물. 이는 〈무한도전〉이 자신의 논리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일 테다. 〈1박 2일〉-〈신서유기〉 시리즈나 〈런닝맨〉처럼 〈무한도전〉적인 것을 일찍이, (〈무한도전〉 자체를 종종 능가할 만큼) 효과적으로 '반복'한 프로그램들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를 구동시키는 핵심 동력이 게임이라는 건, 또 당시 케이블 채널에서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막무가내와 고수위의 수다로 가득 찬 토크쇼 〈라디오스타〉가 “고품격 음악 방송”이란 반어적·자조적 캐치프레이즈를 계속 내건 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패착이 아니라 실패일 뿐이며, 이 보수성이 앞서 거론한 프로그램들이 당대의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작동했음은 자명하다. 아니, 〈무한도전〉, 〈1박 2일〉 시즌 1, 〈라디오스타〉 같은 '또래'의 초인기 예능 프로그램들이야말로 급진성과 보수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던 시대의 정수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지금 노홍철이 〈1박 2일〉 시즌 1의 멤버였고 〈라디오스타〉의 첫 회 게스트가 정형돈이었다는 '기막힌' 우연을 떠올리는 중이다) 그러니 한편으로 그 이후의 프로그램들에게는 이들이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맞닥뜨리고 대결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즉〈무한도전〉적인 것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존속은 예능화될 수 없던 '실재'를 최대한 예능화하는 길을 가면서도 이 실패를 (자크 데리다의 표현을 빌려) 상속하려는 예능 프로그램들의 계열 안에서 가능했다. 이렇게 본다면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2000년대의 프로그램들 이외에 (특수한) 일상의 예능화를 시도한 2013년 이래의 관찰 예능 —이 중에서도 VCR 촬영분과 편집실 촬영분 양자를 적극 활용하며 시제(Tense)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을 방해한 〈나 혼자 산다〉는 독특한 사례다— 이나 인터넷 방송과 TV 예능 사이의 이중구속을 전제 삼은 〈마이 리틀 텔레비전〉, 그리고 그중에서도 프로그램의 전제를 영리하게 이용해 눕방, 낚방, 말방 등 본인이 하고 싶은 걸 그저 방송에 내보내고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던 이경규의 시도들, 박준형의 〈와썹맨〉·장성규의 〈워크맨〉을 비롯해 '선을 넘는' 캐릭터성과 그것을 증폭/통제하려는 편집 사이의 긴장을 심화된 형태로 보여 주는 최근의 웹 예능들에서도 〈무한도전〉적인 것은 여전히, 상속의 계열을 그리며 강력하게 존속되고 있다. 말하자면 진정성의 범람. (그리고 그 새로운 기점으로 〈가짜 사나이〉가 출몰한다)



당연하지만 이는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투명하고 자명하게 이뤄진 변화가 아니라 이후 이어진 계열 속에서 사후적으로 발견된 바이며, 나아가 〈무한도전〉적인 것의 성립 자체가 사후적으로 이뤄진 것이라 해야한다. (한편 앞서 언급한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서, 어째서 이 계열이 대부분 반-성장적 남성 예능들로 이루어져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김기태의 논문 「〈무한도전〉에서의 '평균' 남성상의 담화적 구축」이 해답까지는 아닌 힌트를 준다. 또한 재재의 〈문명특급〉은 〈무한도전〉적인 것에 들러붙은 남성성을 전유하려 든 독특한 사례라 할 만 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무한도전〉적인 것'의 계열 속에서 작금의 지식인들이 말하는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내지는 탈진실(Post-truth)에 대한 담론과 함께 '과잉 사실(Over-facts)'의 담론이 (서로의 반대항으로서가 아닌) 대위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시기에 촬영된 사건들을 하나의 방영분으로 묶은 건 아닌지 팬덤의 차원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생경한 일이 담긴 비디오가 있으면 곧바로 편집 없는 풀 버전부터 요구하고, 협찬 받은 물품이 협찬이라는 걸 밝히지 않으면 '뒷광고'라고 매도하는 작금. 세계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세계에 재생산하는 우리의 주체성은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만큼이나 그 어느 때보다도 '실재'의 감각이 강력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또 만들고 있다. 이 보편적인 분열성, 혹은 기괴한 진정성. 이쯤에서 앞서 한 말을 (괄호를 떼고서) 다시 중얼거리고 싶다. '콘텐츠'라는 뭉텅이 진 개념의 한국적 판본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과도한 주장일까?


잠깐, 나는 〈무한도전〉이 이 조류를 혼자 낳았다며 억지를 부리려는 게 아니다. “〈무한도전〉적인 것의 성립 자체가 사후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란다. 당시의 다른 인기 예능 프로그램들 —가령 70년대 말의 〈청춘만세〉에서 최근의 〈하트시그널〉에 이르는 '소개팅 버라이어티'의 질긴 계보를 무시할 수 없다— 이나, 선진국(특히 일본)들이 선보인 형식을 암암리에 적극적으로 밀수하던 (〈무한도전〉도 결코 예외가 아닌) 한국 문화 시장의 역사를, 또 단일한 매체의 역사 세우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공공연해진 작금의 문화적 생태계를 생각하면 그건 성급하고 지나친 억지일 뿐이다. 하나 그럼에도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예능화 될 수 없던 '실재'를 예능화하는 게 가능하도록, 또 기본값이 되도록 〈무한도전〉이 길을 텄다는 것만큼은 당신께서도 이제 충분히 동의하시리라. (오히려 〈무한도전〉은 바로 그런 환경 속에서만 가능했던, 나아가 그런 환경을 형식적으로 육화한 극단적인 '한국적'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주체성의 주름들을 파악하는 데 있어, 〈무한도전〉은 분명 건드릴 수밖에 없는 돌출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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