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집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쳤다. 딸(중1)의 아침 식사를 차린 뒤 딸 쪽으로 선풍기를 옮기려다 선풍기 줄에 걸려 넘어졌는데, 하필 피아노 의자 모서리에 얼굴을 부딪쳤다. 뜨거운 고통이 찾아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아주 잠시 의식이 흐려진 것도 같다. 놀란 딸이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거친 신음(끄으……으아어……)만 내뱉었다. 그러고는
-엄마, 피!
딸의 호들갑에 몸을 일으켜 전신거울 앞에 섰다. 왼쪽 광대뼈 밑에 한일자로 팬 상처가 났고 거기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휴지로 대충 닦은 뒤 벽에 기대어 앉았다. 온몸의 기운이 쑥 빠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겁이 많아 몸을 사려온 인생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하나둘 몸의 기능이 쇠퇴하면 나는 이렇게, 오른발에 왼발 걸리듯 어이없이, 부지불식간에 다치고 말겠지(부지불식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균형 감각이 부족하거나 엄벙덤벙한 탓인지 젊은 시절부터 왕왕 넘어졌고 말이야. 이 정도를 다행으로 생각해야겠지. 더 늙어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그 얼마나 위태롭고 미덥지 못한가……. 비관은 속도가 빨라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사람인 양 침울해졌다.
겨우 몸을 추슬러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에 방문했다. 의사 선생님은 (큰 차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얼굴이니 ‘성형외과’로 갈 것인지 결정을 하라고 했다.
-열 살 아이라면……, 일흔 살 노인이라면…….
이런 구절들이 귀에 들어왔지만 선생님 말씀은 빠르고 나는 혼몽한 터라, 선생님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린아이라면 민감하니 성형외과 쪽으로 가겠지만 노인이라면 괜찮지 않겠나, 이런 말씀인 걸까. 쉰 살을 넘은-그러나 스스로 동안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적절할까. 나는 정녕 선생님의 눈에도 동안인 걸까. 상처는 어느 정도 흉터를 남길까. 선생님은 믿을 만할까. 나는 혹시 후회하게 될까. 친구들은 왜 성형외과로 가지 않았느냐며 타박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지러운 와중에 선생님은 인근 종합병원 이야기까지 꺼냈는데 작금의 의료 사태로 인해 상황이 심각하다는 말인 듯했다. 그 말인즉슨 어쨌거나 이곳에서 치료하기를 권하는 듯했고, 당시의 나는 뭔가를 제대로 판단할 기력이 없었으며, 이곳을 나가 다른 병원에 다시 접수하고 대기한 뒤 사고 경위를 설명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여 그냥 치료해 달라고 말했다.
하여, 얼굴을 몇 바늘을 꿰매고 넘어질 때 다친 오른쪽 무릎 물리치료를 한 뒤 돌아왔다. (다음 날 눈두덩이 탱탱 붓고 눈이 심하게 충혈되어 안과 검사도 받음.)
약을 먹고 통증이 가라앉자 몸과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누운 채로 지인이 추천한 존 치버의 <헤엄치는 사람>을 읽었다. 소설은 우습고 서글펐다. 주인공 네디 메릴은 지인의 집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한 손은 물에 담그고 다른 손에는 술잔을 들고서), 이웃의 수영장들을 차례로 통과해 8마일 떨어진 집까지 가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운다. 그는 나와 완벽히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입수할 때 뛰어들지 않는 남자를 경멸하고 절대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지 않는다. 반면에 나는 ‘점프 스타트’를 제대로 해낸 적이 없고 웬만하면 사다리로 오르는 사람. 게다가 그는 평영으로 가지만 나는 여전히 평영이 난해하고 25미터 가는 것조차 버겁다. 무엇보다 그런 얼토당토아니한 도전을 할 리가. “태양의 열기와 강렬한 기쁨”으로 휩싸인 그는 마침내 그 어려운 걸 해내고야 말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숨겨진) ‘현실’은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종국에는 힘이 빠진 나머지 난생처음 계단으로 입수, 사다리를 붙들고 올라가며 모잽이헤엄을 치는 등 짠내의 극치를 이룬다는. 실력은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같은 수영인으로서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스스로도 현실 감각이 결여되었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고.
욱신거리는 통증이나 볼썽사납게 부어오른 눈두덩 덕에 현실을 또렷이 되새긴다. 지금 나의 현실은 이를테면 수영은 당분간 하지 못하리라는 것. 눈물을 머금고 (한 달 단위로 연기가 가능하므로) 수영장에 한 달을 쉬겠노라고 연락했다. 나는 그동안 간절히 헤엄치고 싶은 사람이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