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가현 Oct 19. 2023

어느 날 밭에 모르는 배추가 생겼다

도대체 그 많던 배추는 누가 심었을까?

"아니, 농촌에 와서 살겠다는 젊은 사람이 농작물 귀한 줄 모르면 어떡해?!"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 밭에 배추를 심은 장본인이라며 다짜고짜 나에게 여러 가지 소리를 던졌다. 수화기를 통해 넘어온 여러 가지 소리 중 기억나는 한 가지를 적어보았다젊은 사람이 농작물 귀한 줄 모른다라... 아니 그런데 귀한 농작물을 왜 허락도 없이 제 밭에 심으신 거죠? 나로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내 밭에 뭘 심었다며,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았는지 알 수도 없이 퍼붓는 컴플레인이 황당하고 무서울 뿐이었다. 


구옥과 밭을 매매하기로 한 시점은 여름, 밭에는 옥수수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옥에 사시던 할머니는 고령인지라 밭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동네 이웃 영자에게 무료로 밭을 빌려주고 있었다고 했다. 밭을 쓰는 대신 간간이 수확한 농작물을 나눠주며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밭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오자 옥수수를 끝으로 밭을 내어줘야 하는 게 아쉬웠던 것 같다. 내가 구옥을 오가며 공사 견적을 의뢰하던 때, 한 주민이 다가와 본인이 밭을 관리하던 사람이라며 계약 상 올 겨울까지 밭을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동산의 주인이 바뀌면 이전 계약은 소멸된다. 원래는 옥수수 수확을 끝으로 밭에서 손을 떼는 게 맞지만, 나도 마을에 새로 들어가는 입장이고 좋은 이웃이 될 필요가 있으니 겨울 배추까지 하시라, 다만 공사차량이 진입해야 하니 주택 반경 몇 km에는 농작물을 심지 마시라고 영자 씨에게 말씀드렸다. 하지만 웬걸? 몇 주 후 돌아와서 보니 집 주변까지 빽빽하게 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경작을 허락해 준 주민 영자 씨가 본인의 친구인 말숙 씨에게 돈을 받고 이 밭을 넘겨준 것이다. 본인이 공짜로 쓰던 밭을 타인에게 유상으로 빌려주다니? 말숙 씨 입장에서는 자기가 애써 키운 배추를 공사차량이 밟고 망가뜨리니 (하지만 겨우 배추 5 포기에 불과했다) 화가 날 만했다. 하지만 그런 분쟁은 돈을 주고받은 영숙과 말숙 둘이서 해결할 일이지, 이 정황을 모르는 밭의 주인을 소환해서 오히려 일을 키우고 말았다. 아마 영숙과 말숙은 농촌에 와서 살겠다는 젊은 사람이 세상 물정을 알겠냐며 큰 소리 한 번 치면 본인들 입맛대로 밭을 쓸 수 있겠다는 나름의 셈을 했던 모양이다.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말숙은 본인의 남편과 함께 집으로 찾아왔고, 우리가 도착하길 기다리던 남편은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신발은 벗고 맨발로 집 앞을 서성이며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려 했다. 


우리는 차 안에서 그 상황을 보다가 바로 경찰을 불렀고, 자신들의 계획 속에는 없었던 경찰차가 등장하자 말숙 씨 남편은 다시 셔츠를 곱게 입고 신발도 단정하게 신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경찰이 묻는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시골살이는 야생이고 힘의 논리가 정직하게 작동하는 세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배추를 보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화병의 징조.


모르면 몰랐겠지만 이런 정황을 알게 된 이상 계속 밭을 사용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법적인 검토도 받았다.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결국 말숙은 배추 농사를 포기했고, 영숙이 대신 우리와 합의 하에 농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신뢰가 깨진 이상, 밭을 마음대로 들어올 수는 없고 작물관리를 위해 밭을 들어와야 하면 하루 전 미리 연락할 것을 요청했다. 그 사이에 배추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푸릇하고 빽빽한 배추는 힐링이 아니라 오히려 킬링하는 풍경이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배추를 수확하는 척 다른 농작물을 심을까 봐 삽, 고추노끈, 문짝과 옷장을 이용해서 간이 담장을 만들어놓았다. 


이제는 추억이 된 이때를 우리는 '고추노끈대첩'이라고 부르곤 한다.  


버려진 옷장을 끌고 와서 만든 담장
버려진 문짝으로 만든 담장
외부인 출입금지 푯말과 해맑게 자라는 배추들
우리 밭을 지키기 위해 맨손으로 치른 고추노끈대첩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11월이 되고 영숙에게 배추를 언제 수확할 건지 연락했다. 그런데 낌새가 이상했다. 배추 수확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요즘 배추값이 안 좋다고 했다. 나로서는 빨리 배추 수확을 끝내고 밭에서 영숙이 나가줘야 남은 공사를 맘 편하게 진행할 수 있으니, 배추를 언제 수확할지 목 빠져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밭에 남아있는 배추를 본 행인이 김장할 배추가 모자라다며 판매도 하냐고 묻기에 영숙과 직접 연결해주기도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판매를 거절하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하루하루 걱정과 불안이 일던 날들.


결론은 배추를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냥 밭에 놔두면 퇴비가 되니 겨울 내내 놔두라는 무책임한 영숙.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농작물 귀한 줄 모른다던 사람 어디 갔어? 그렇게 귀한 농작물을 먹지도 않고, 마을에 나눠주지도 않고, 팔지도 않고, 흙바닥에 버리겠다고? 시골이주를 하며 차곡차곡 쌓였던 분노가 배추밭에서 터졌다.


따뜻한 연말을 보내기 위한 배추트리 만들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배추만 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 영숙 한 사람 때문에 마을 주민 전체를 의심하고 오해하게 되는 꼬인 마음을 신년까지 품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이제 배추와의 인연을 끊고 자비로운 마음을 되찾자. 주인을 잘못 만나서 김치가 되지 못한 배추에게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주자는 마음으로 배추트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예쁜 나뭇가지도 꽂고 나름 데코레이션도 했다
약간 무서워 보이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만들었던 배추트리
새해에는 더러운 악귀들을 쫓아내줘


본인에게 이득이 될 것 같으면 금세 취했다가, 조금만 번거롭고 귀찮아지면 쉽게 버려버리는 얄팍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숲 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 위로를 구했다. 버려진 배추를 보면서 자연을 떠올렸다. 자연을 그렇게 착취하면서 순수한 농부인 척 스스로를 포장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트리에 배추를 하나하나 쌓아 올리며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을 고백했다. 트리에 불을 켜두고 고요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번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봄이 되고 날씨가 풀릴 때쯤, 비닐멀칭을 치우기 시작했다. 몇 주에 걸쳐서 800평 밭에 촘촘히 깔린 비닐을 치웠다. 불 켜진 트리를 보면서 고요해진 마음에 다시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한 멀칭제거작업. 

그래도 어제보다 무던해진 오늘의 마음.


증오의 비닐멀칭


이전 08화 어쩌면 인구소멸을 막는 건 마라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