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을 대만답게 만든 가오슝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6편 Taipei-17)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aipei



17. 대만을 대만답게 만든 가오슝


대만 법인 사무실이 있던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台北) 시는 대만 섬 북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만 섬 남단에는 남부 지역의 최대 도시이며 또 대만 제2의 도시라고 불리는 가오슝(高雄)이란 도시가 있었는데, 두 도시 간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와 거의 유사했다.


이 가오슝에는 대만 법인의 유일한 연락사무소가 있었는데, 대만 법인 근무하던 시절 법인에 부임해서 이미 반년이 다 되도록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이 사무소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하다가 마침내 2007년 6월에 시간을 내서 처음으로 가보게 되었다.


사진) 가오슝 연락사무소가 입주해 있던 건물과 그 건물의 옥상에서 바라본 가오슝 모습 (2007. 6월)


사진) 가오슝 연락사무소 내부


가오슝은 인구 약 300만의 도시로서 최근에는 인구면에서 대만섬 중부에 위치한 타이중(台中) 시에 다소 뒤처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오슝은 아직은 여전히 대만 제2의 도시로 인식되는 그런 도시다.


가오슝에는 대만 최대 항만도 있었는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이 항만은 취급 물동량 기준으로 전 세계 3~4위권에 들었던 세계 최대 항구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중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중국에 있는 항만들이 10위권 안으로 대거 진입하게 되면서 2018년 기준으로는 14위로까지 순위가 밀려나게 되었다.


(2018년 기준 전 세계 항구 물동량 순위)

https://blog.naver.com/smellofmoney/222045136717


가오슝 출장은 법인 직원 2명과 함께 차량으로 이동했는데, 도착하던 날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너무나도 화창한 날씨였다. 덕분에 85층 건물에 위치한 호텔 방에서 가오슝 시내와 가오슝 앞바다의 멋진 장관을 직접 보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다.


사진) 가오슝 최고층 건물 '85 Sky Tower'에서 내려다본 모습. 이 건물 상층부의 호텔에 숙박할 때 찍은 사진이다. (2007. 6월)


(가오슝 최고층 건물 85 Sky Tower 소개 블로그)

https://blog.naver.com/cruiserlaw/220692787705


그런데 호텔에서 1박을 하고 일어나 보니 그렇게 화창했던 날씨가 하루 만에 완전하게 돌변해서 가오슝시 일대는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그러한 날씨로 변해버렸다. 한국에도 폭우가 심하게 쏟아지는 날이 물론 있지만 역시 아열대 지방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한국의 폭우보다는 훨씬 더 심했다.


사진) 1박 한 다음날 가오슝 시내 도로. 폭우로 인해 도로가 물바다로 변해있는 모습.


대만에 부임한 후 타이베이의 내 집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1박이라도 숙박을 했던 것은 이 가오슝에서가 처음이자 또 마지막이었는데, 어쨌든 이렇게 가오슝을 처음 방문하게 되면서 타이베이와는 나름 다른 가오슝과 가오슝이 속한 대만 남서부 지역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오슝으로 대표되는 남서부 지역은 타이베이로 대표되는 북동부 지역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지 않은 차이점들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우선 정치적 성향에서 어느 정도 뚜렷한 구분이 있었다.


대만에는 중국 본토에서부터 장개석이 이끌었던 국민당과, 나중에 대만섬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민진당이라는 양대 정당이 있었는데 국민당이 보수 성향이 강했다면 민진당은 진보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가오슝이 있는 남서부 지역은 진보 성향의 민진당을 지지하는 층이 두텁고, 타이베이 등 북동부 지역은 보수 성향의 국민당 지지층이 전통적으로 두터웠다.


한국에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양대 정치 세력이 있고 그 핵심 지지 기반도 영남과 호남으로 대체로 갈라지는 지역적 특색이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 대만에도 역시 있던 것이었는데, 두 국가 모두 남서부 지역이 진보적인 정당을 보다 더 지지하는 묘한 공통점도 있었다.


그런데 대만의 수도이며 북동부의 중심이 타이베이였다면 남서부의 중심은 대만 제2의 도시로 불리는 가오슝이었기 때문에 가오슝이 북동부와는 대비되는 남서부 민진당 지지 계층의 상징적인 도시로 부상되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 대만 양대 정당 당기. 좌측 국민당, 우측 민진당. 색이 확연히 달라 이 색으로 양대 정당을 대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지역별 정치적 성향은 시기별로 다소간의 차이가 있고 또 최근에는 과거보다는 지역별 정치적인 성향이 불분명한 경향도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2014년과 또 2020년 선거 때의 지역별 지지 정당을 나타내는 아래의 지도를 보더라도 '남서부는 민진당 강세, 북동부는 국민당 강세'라는 이러한 전통적인 분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모습을 여전히 볼 수 있다.


(2014년 대만 지방 선거 지역별 구도)

https://blog.naver.com/ysta44/220605696554

(2020년 대만 총통 선거 지역별 구도)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53&aid=0000026977


그런데 이처럼 두 지역 간에 정치색이 뚜렷하게 차이 나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두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만 서로 다른 동질적인 대만인이 아니고 원래부터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장기간 살아온 '서로 꽤 다른' 이질적인 대만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대만섬의 주인이었지만 이제는 대만 인구의 약 2% 수준밖에 안 되는 말레이-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을 제외하면 대만인은 크게는 본성인(本省人)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된다. 이중 본성인은 대만 인구의 약 85%로 17세기에 정성공의 대만 정복 즈음에 대만으로 유입됐던 중국인이다. 반면 인구의 약 13%인 외성인은 2차 대전 이후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들어올 때 대만으로 왔던 중국인들로써 국민당 소속 군인과 가족이 대부분이었다.


인구수로 보면 외성인이 절대적으로 약세였지만 군대라는 무력 수단을 가지고 있었던 집단이 외성인들이었기 때문에 외성인은 장개석의 집권이래 오랜 기간 정치, 경제, 사회 등 대만의 거의 모든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인구는 적어도 그 기반과 세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과거 대만의 사회 지도층은 모두 외성인이거나 혹은 국민당을 추종하는 그런 세력으로만 채워져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두 집단 모두 결국은 같은 중국의 한족이고, 단순히 대만에 들어온 시점만 차이가 있으니 상호 간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좀 더 면밀하게 보면 같은 중국인이고 또 같은 한족이지만 두 집단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이질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중국에 대한 인식이 다름


우선 무엇보다 두 집단의 중국에 대한 인식 자체부터 크게 다르다. 중국 본토를 떠나서 대만에 들어온 지 불과 80년도 안된 외성인들은 중국 본토를 여전히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인식하며 대만을 중국의 일부분으간주하고 또 자신들을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반면 외성인보다 약 300여 년 먼저, 즉 이미 너무도 오래된 시점인 1600년대에 중국에서 대만으로 넘어와서 수 백 년 넘게 대만에서만 살아온 본성인들은 이제는 더 이상 중국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대만은 중국과는 다른 별개의 국가로, 또 자신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으로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55년간 중국에서 분리되어 있었던 홍콩의 주민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자신은 더 이상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라고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또 미국인들이 식민 초기 자신들을 영국의 북미 식민지에 거주하는 영국인으로 인식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과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자신들을 독립된 미국인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과도 유사한 경우인 셈이다.


한마디로 두 집단은 중국 및 중국과의 연관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근본적으로 크게 달랐다.


2) 언어 역시 달라서 상호 소통 불가


두 집단은 원래 사용하던 언어도 완전하게 달랐다. 경상도, 전라도 방언 정도의 차이로 다른 것이 아니고 아예 각각의 언어로는 상호 간에 대화가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달랐다. 상대방의 언어는 하나의 외국어와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본성인은 원래 중국 남부에 있는 푸젠성(福建省)의 언어인 민난어(閩南語)를 사용했다. 17세기에 정성공이 대만으로 들어올 때 같이 들어온 병사들 대부분이 정성공의 주 활동 무대였던 푸젠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만 남서부 현재 타이난(台南)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대만 남서부가 유독 민난어 기반이 두텁다.


반면, 외성인은 장개석이 공산당에 패해 1949년 대만으로 도피할 즈음 함께 대만에 들어온 국민당 출신 사람들이다. 그런데 국민당군은 중국 특정 지역 출신이 아니라 중국 전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라 지역별로 다른 언어로는 대화가 불가했기 때문에 이미 중국 본토에 있었던 시절부터 중국의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즉 이들의 언어는 중국의 북방 언어인 표준어였던 것이었다. 또 이들은 타이베이를 수도로 삼고 그곳을 근거지로 대만섬 북동부 지역에 주로 거주했기 때문에 북동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는 학교에서부터 표준어를 습득하도록 오랜 기간 강요하였고 그 결과 이제 대만 젊은 사람들 중에는 원래 대만 언어였던 민난어를 제대로 구사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중국 표준어가 대만 공용어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민난어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는 의미인데 실제 대만법인의 직원들 중에도 민난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젊은 직원들이 꽤나 있었다. 즉 공용어로서의 민난어는 이미 사라진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집에서는 민난어를 주로 사용하는 가정이 여전히 대만에는 있었는데, 가정에서의 민난어 사용도 역시 정치적 성향과 유사하게 대만 남서부와 북동부로 갈라진다. 국민당의 터전이고 국민당 지지층이 두터운 북동부에서는 민난어가 잊히고 표준어로 많이 대체되었던 반면, 정성공과 함께 온 본성인들의 터전이었던 남서부는 여전히 민난어를 사용하는 가정이 적지 않았는데 아래의 도표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대만 지역별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 도표)

https://michaelturton.blogspot.com/2018/02/maps-of-language-use-in-taiwanese.html

※ 녹색이 짙을수록 민난어 사용 가정이 많다는 의미


대만의 거래선들과 식사할 때 술 몇 잔과 함께 분위기가 좀 무르익으면 가끔 민난어를 구사하거나 민난어 노래를 하는 거래선들이 있었다. 결혼식장에서도 표준어를 하다 갑자기 그렇게 민난어로 바꾸어서 말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민난어로 대화가 잠시만 바뀌어도 항상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다소 딱딱하던 그 공간의 분위기가 갑자기 신기하게도 꽤 부드러워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마 대만 인구의 85%나 점유하고 있지만 정부, 군대,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13%의 외성인들로부터 오랜 기간 수많은 핍박을 받아왔던 본성인들이 외성인은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동지라는 그런 느낌이 서로에게 진하게 전해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1947년 발생한 2.28 사건 경우처럼 외성인들에 의해 본성인들이 끔찍하게 당했던 사건도 있었다. 경찰에 의해서 타이베이 거리에서 본성인이 사망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간 온갖 탄압을 받아왔던 본성인들의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이에 대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 시위를 진압했는데 이 진압 과정에서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본성인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 바로 이 2.28 사건이다.


(대만 2.28 사건)

http://blog.daum.net/gmania65/750


3) 개인 성향도 차이가 있음


두 집단 간 차이점은 또 있는데, 태어난 지역과 살아온 삶이 두 집단 간에 꽤 달라서 결국 개인적 성향에서까지도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본성인들은 대만의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자연환경 속에서 대대로 오랜 기간 거주해왔고 그러한 환경에 기반한 성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기후가 좋은 지역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들이 갖는 성향과도 유사할 것이다.


또 무려 반세기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일본 식민 지배도 직접 받아왔던 바 일본 문화 영향도 역시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대만보다는 상대적으로 짧은 36년간 일본 지배를 받았던 한국에서조차도 예를 들어 당구장에만 가도 여전히 어른뿐 아니라 심지어 10대 학생들까지도 사용하는 당구 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어인 것을 봐도 그 식민 지배 영향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외성인은 기후가 척박한 중국 북부지역 출신도 적지 않고, 또 2차 대전 내내 일본과 또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과 장기간의 살벌한 전쟁을 치르며 살아와야 했던 바, 일본의 대만 통치 반세기 간 별다른 전쟁 없이 대만섬에서 살아온 본성인과는 살아온 환경이 크게 달랐다. 외성인이 겪어온 그러한 척박한 기후와 환경이 외성인의 성향에도 어느 정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기후가 별로 좋지 않은 영국 또는 독일 북부에 사는 영국인과 독일인 성향이 이탈리아인 성향과는 꽤 다른 것과도 유사할 것이다.


결국 같은 중국 출신이고 또 이제 같은 대만인이지만 대만 북동부와 남서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만에 유입된 시기, 언어, 기후, 역사, 개인적 성향까지 이처럼 서로 꽤 달랐고 이런 차이들이 상호 간 깊은 이질감을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그 이질감이 자연스럽게 각각을 대변하는 다른 정당으로의 지지로 승화되었던 셈이다. 즉, 본성인의 터전인 남서부는 민진당으로, 외성인의 터전인 북동부는 국민당으로....




외성인 세력을 대표하고 또 오랜 기간 대만의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은 1912년 중국 본토에서 창설된 오랜 역사를 가진 정당이다. 이 국민당은 1949년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피할 때 같이 대만으로 이전됐다. 반면 본성인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이라고 볼 수 있는 민진당(民進黨)은 본성인인구가 85% 수준으로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1986년이 되어야 비로소 창당될 수 있었다.


현재는 대만의 집권당이 된 민진당이 그렇게 뒤늦게 창당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949년에 장개석에 의해 발효되어 1987년까지 무려 39년간 지속된 대만의 계엄령 때문이다. 계엄령을 통한 철권통치로 국민당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은 합법적으로 규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결국 계엄령 덕분에 국민당은 장개석 사후에 민진당이 최초로 집권하는 2000년까지 무려 약 50여 년간 지속적으로 대만 집권당이 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서슬이 시퍼런 이런 계엄령이 대만 전역에 발효되고 있었음에도 민주화에 대한 대만인의 갈망은 점차 강해졌고, 마침내 대만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1979년 12월 발발하기도 했다. 이 시위가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이라 불리는 시위인데, 이 시위도 바로 본성인의 터전이며 동시에 반정부 세력의 상징적 도시로 인식되었던 가오슝에서 발발했다.


'메이리다오'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중국 한자로 대만 섬을 의미하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반체제 잡지사 간부들이 이 시위를 주도했었기 때문에 이 잡지사의 이름이 해당 사건에 붙여졌다. 한편으로는 가오슝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가오슝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한다.


(메이리다오 사건)

1. http://www.kp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716

2. https://namu.wiki/w/%EB%A9%94%EC%9D%B4%EB%A6%AC%EB%8B%A4%EC%98%A4%20%EC%82%AC%EA%B1%B4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 대다수는 10년 이상의 꽤 무거운 형을 언도받게 되는데, 당시 이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과 그들을 변호했던 변호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정당이 바로 현재 대만의 집권당인 민진당이었던 것이다. 결국 국민당에 대항하는 대만 양대 정당 중 하나이며 또 마침내 집권당이 된 민진당의 뿌리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대만 남부 도시 가오슝과, 가오슝에서 발생한 반정부 시위에 있었던 셈이다


당시 이 사건의 변호인 중 하나로 활동했던 천수이볜(陳水扁)은 이후 약 20여 년이 지난 2000년에 대만 역사 최초로 민진당 출신 총통에 당선됐다. 대만 정부 수립 50년 반세기 만에 국민당 소속이 아닌 인물이 대만의 총통으로 취임하는 역사적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 대만 역대 총통 재임기간, 출생지, 소속 정당 ]




만일 대만에 2차 대전 이후 비교적 최근 중국에서 대만으로 유입된 '외성인', '표준어', '국민당'만 존재했다면 대만이 비록 중국 본토와는 분리되어 있더라도 대만의 많은 것들은 중국의 것과 같거나 유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에는 장개석이 대만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거나 잉태되어 있었'본성인', '대만어' 그리고 '민진당'이 존재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대만만의 요소들 덕분에 대만은 오늘날 중국 본토와는 너무도 다른 대만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특색이 있는 그런 공간으로 발전했다.


오랜 기간 외성인이 대만을 지배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 이 세 가지 요소가 남아있었던 덕분에 그 대만만의 특색이 지켜지고 성장할 수 있었던 셈이다.


대만의 대중 노래나 영화 등을 보면 도처에서 오직 대만만 갖고 있는 그 특색을 느낄 수 있는데 중국 대륙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아래 링크에서 대만의 영화나 노래를 직접 접해보면 중국의 영화나 노래와는 뭔가 다른 남방 대만만의 독특함이 무엇인지를 바로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남방 문화, 아열대성 기후, 일본 문화, 민난어 등이 묘하게 뒤섞여서 뿜어내는 대만만의 그 어떤 독특함 말이다....


(대만 만화영화 Hapiness Road, 01:13)

https://www.youtube.com/watch?v=pa6QPWZ8HfM&list=PLBPxfOEHMNi-3LGMK-f1EKNGJ4YCJOE43

(대만어로 부르는 대만 노래 방랑 인생, 放浪人生, 04:17)

https://youtu.be/1FZJrUZla60

(대만 대표 청춘 멜로 영화, 14:42)

https://www.youtube.com/watch?v=NR2zPvJZHBk


대만이 중국과 이렇게나 다른데, 이러한 대만만독특함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 함께 녹아내려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경우가 혹 발생한다면 정말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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