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힘든 것보다 더 힘들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선택할 수 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세계적인 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하루키는 뉴욕 타임스를 읽다 한 마라토너가 달리기할 때 되뇐다는 이 문구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아, 자신도 이 문구를 마라톤할 때 사용했다고 한다. 풀마라톤에서 요구하는 42.195km라는 거리는 인간이 달리기 아주 힘든 거리이다. 얼마나 힘들면 마라톤의 기원이 된 그리스 마라톤 전투의 병사가 이 거리를 뛰고 사망했겠는가? 특히 하루종일 책상머리에 앉아 일 하거나 쉬는 날 별로 움직이지 않고 실내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신기하게도 수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비인간적인 거리를 달려내는 극기의 싸움에 도전한다. 내가 참여한 2024년 JTBC 서울 마라톤 대회만 봐도 1만 7,000명이 풀 마라톤에 참가했고, 10km 대회 인원까지 포함하면 총 3만 7,000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널찍한 도로에 인파가 도열한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일을 자진하는 것은 아마도 지루한 일상에서 성취감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꾸준히 노력해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대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큰 뿌듯함을 주는지는 해본 사람들만 알 수 있다. 아마 나도 이런 고무적인 마음으로 풀 마라톤을 신청했던 것 같다. 마라톤이 시작되고, 한 걸음씩 착실히 걸어 나갈 때까지는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일이나 여가로 방문했던 서울 곳곳을 내 두 다리로 누비는 즐거움은 마치 여행을 가듯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의 행복을 느끼게 해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라톤에 참여하기로 한 과거의 나를 원망했다.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숨이 차고, 발바닥이 아프고... 10km, 20km를 지날수록 몸이 부위별로 비명을 질러댔다. 처음에는 견딜만했지만,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누적되며 마음이 꺾이고 달리기를 그만두고 싶어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만둔다고 해서 내 삶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서울 도심에서 진행되는 마라톤이었기에 주요 지하철역들을 모두 거쳐 가니 도로를 벗어나 지하철 타고 집에 가고 싶은 DNF(Don’t Finish, 중도하차)의 유혹이 수십 번씩 들었다.
설상 가상으로 21km 지점을 지날 때부터 발바닥이 아파지더니, 25km를 지날 때는 오른쪽 허벅지에 쥐가 났다. 이후 뛰면 뛸수록 왼쪽 종아리, 오른쪽 종아리 순으로 쥐가 나며 걷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지만, 스트레칭해주고 구급요원의 도움으로 냉파스를 뿌리니 생각보다는 컨디션이 괜찮았다.
사실 그때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고통이 아닌 괴로움이었다.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괴로움은 고통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고통은 우리가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적 고통을 말한다. 예를 들면, 달리기에 아주 숙련되지 않은 나 같은 인간이 몇십 킬로를 뛰면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은 우리가 만들어낸 부가적인 고통이다. 근본적인 고통을 겪다 보면 과거를 원망하고 미래를 걱정하게 된다. 과거를 떠올리며 '아 그래, 어차피 나는 예전에 마라톤을 뛰어본 적이 없으니 어차피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떠올리며 ‘이제 15km나 남았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너무 절망적이야.’라고 생각하는 식으로, 현재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수용전념치료(Acceptance-Commitment Therapy)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바꿀 수 없는 고통은 수용하고 괴로움은 선택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고통스러운 상황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하고 방황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타의나 자신의 높은 기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속한다. 그렇게 하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의식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도록 떠밀린 것이다. 이를 정신의 자동조종 상태(Auto-pilot)라고 말하는데,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이 없으니,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통제하는 느낌을 가지려면 하든 하지 않든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30km 지점에서의 나는 결국 ‘완주’하기로 선택했다. 고민해 보니 조금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근골격계에 아주 큰 손상을 줄 만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42km 중 30km를 달렸고, 앞으로 12킬로는 충분히 완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언제든 ‘포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41km 지점에서 포기를 한들, 그저 아쉬울 뿐이지 내 삶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가 오히려 내가 계속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반드시 끝까지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겪은 상태에서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거나 맹목적으로 완주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참고 달리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얻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나의 고통과 괴로움을 구분하는 것은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마음의 여유를 주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결국 마라톤을 완주했다. 전에 없던 강도의 운동을 하니 일시적으로 면역력이 약해져 감기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달리기를 선택하며 내년의 마라톤을 기약한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수용하되, 달리기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움은 사라졌다. 물론 삶을 살아가며 반복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겠지만, 그것을 미리 걱정하지는 않을 거다. 매 걸음마다의 선택이 우리를 만들어갈 것이고, 언제든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으니,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두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무슨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 그 괴로움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한 번 고민해 볼만한 문제이다. 달리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