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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빈 May 25. 2024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길치의 생애 첫 혼여행



작년 연말, 퇴사를 한 달 앞두고 불현듯 도쿄 숙소를 예매했다.


사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에 혼숙하기 좋은 도쿄 숙소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딱 마침 특가가 떴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숙소가 있는데, 도쿄에 갈 비행기 표가 없잖아?’ 요즘 시세가 어떤가 괜히 검색해 본다.

퇴사하고 이쯤에 가장 싼 in-out이 언제지,

최소 2박 3일은 다녀오고 싶은데...

이리저리 일정을 보다 12월 5일(화)-12월 8일(금)

3박 4일 일정으로 비교적 저렴한 도쿄행 비행기도 연달아 끊어버렸다.


저지르고 나니 어리둥절하다.

진짜 가나?


 같이 갈 만한 친구를 떠올려봐도 모두 다 멀리 있거나, 일하는 중이라 평일 4일을 동행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혼자 해외여행은 2023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길치인 나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낯선 언어, 길,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하고, 계획 및 준비물도 다 챙겨야 한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길 찾기), 두려운 일(혼자 여행하기)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달까.


이렇게 얼렁뚱땅 버킷리스트를 이루게 될 줄 몰랐지만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짤 수 있는 빡빡한 여행계획,

 내 취향으로 가득 채운 여행루트를 보며 기대감과 불안감이 함께 넘실거렸다.




도쿄는 20살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보았다.

최소 5년 전인 데다 도쿄 지하철 노선은 꽤나 복잡하다. 다른 것보다도 길을 잃지는 않을까, 혼자 다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지는 않을까 고민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우선 일정을 짜보기로 한다.


하루는 문구투어, 하루는 미술 투어를 계획하며 잔뜩 신이 났다. 나는 여행 계획 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평소에는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데 여행에 대해서는 최대한 리스트업 해두는 편인 것 같다. 소중한 기회를 잘 쓰고 싶으니까!


일정과 동선, 휴무일을 고려했을 때, 1일 차는 가볍게 문구 투어, 2일 차는 가보고 싶었던 다이칸야마, 3일 차는 미술 투어, 4일 차는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기를 큰 계획으로 세운다.


세부 계획은 가고 싶은 곳, 휴무일, 영업시간 정도만 찾아서 구글맵에 핀을 찍어두고 미래의 나에게 맡겼다.


(그 바람에 첫날, 점심을 먹으려다 죄다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가히 1시간가량을 마냥 걸어 다녔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2일 차부터는 점심, 저녁 1안, 2안까지 치밀하게 세워두었다. 무엇보다도 식사를 제때하고 에너지 충전하는 건 너무너무 중요하다. 밥만은 꼭 계획을 잘 세워서 가자...)





물론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 두었다.

바로 복잡한 도쿄 지하철 노선 중에 한 노선만 이용하기! 우리나라로 치면 1호선만 타고 다니는 거다.


나는 지하철, 건물 등 GPS가 잘 잡히지 않는(지도앱이 잘 작동하지 않는) 공간에서 쉽게 길을 잃기 때문에 한 노선만 타고 다른 길은 걸어 다니자고 다짐했다.

다행히 가고 싶은 코스가 대부분 한 노선에 있고, 환승을 해야 한다면 그 노선이 있는 가까운 역까지 걸어가서 탔다. 길치의 노하우랄까..


그 덕에 3일 차에는 꽤 많이 걸었지만 체력으로 커버했다! 게다가 여행에 가면 낯선 곳에서의 낯선 경험 그 도파민이 더 커서 체력의 한계를 이긴다.


걷는 수밖에 없다.

첫날, 귀가는 9시 반이었다.

마지막 날 귀가는 11시.

귀가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숙소가 있는 역이 밤에도 밝은, 상권이 많은 동네라 가능했고, 처음에 들었던 안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여기도 다 사람 사는 동네잖아? 너무 많은 것을 걱정했다.'는 깨달음으로 바뀌고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길이 어두워 무서우면 산책 중인 친구와 카카오톡 전화를 하며 함께 걸었고, 걱정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수시로 연락하며 근황과 안전을 알렸다.


처음 써 본 esim은 너무너무 편했고,

한 숙소에서만 머무른 덕분에 짐 없이 나서는 길이 가뿐했으며 혼자 낯선 곳에서 아침을 열고 밤을 닫는, 하루를 온전히 만들어 낸 경험이 좋았다.


완벽했던 날씨!




혼자 여행을 하며 기대했던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거의 못 했지만 부지런히 다니고 무사히 돌아왔다.


사실 공항에서 도쿄 여행이 어땠냐며, 설문을 위해 말 걸어오던 아저씨와 30분간 짧은 일본어,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 나눈 게 일본에서 누군가와 가장 오래 나눈 대화였는데 너무 즐거웠다

아, 나 말하고 싶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3박 4일간 거의 묵언수행이었으니!!

대화 후, 아저씨가 주신 후지산 지우개


여행을 다른 말로 하면 가능성인 것 같다.

넓은 세상으로 떠나면서 더 넓은 시야로 보게 된다.

눈앞의 상황이 버겁고 막막해도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된다.

떠나는 일엔 ‘거리감 만들기’,

‘한숨돌림’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거리두기, 보이지 않는 것_본질에 대해서>

나의 존재감을 비대하게 만들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과 상황, 눈앞의 버거움을 우주의 먼지만큼 축소시켜 보기.

괴로움과 슬픔도 지나감을 알기.
이 힘든 과정 다음엔 성장하는 내가 있을 거라고 믿고, 내면의 힘을 기르기.
혼자서도 나아갈 수 있음을 배우기.
내가 정한 경로를 따라 즐거움을 발견해 가기.


언제든 조금의 여유를 내면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하늘 길이 닫힌 코로나를 지난 이후라 그 소중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여전히 이웃나라, 그보다 멀리 떠나는 일은 망설여지지만 언젠가 더 큰 용기로 더 넓은 곳, 더 먼 문화와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땅으로 떠나보고 싶다.


행성 간의 이동, 그보다는 작은 용기로.


멀리 더 많이 보고, 기록하고 배우는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있길. 내 작은 우주선이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내 안에 시동을 계속해서 걸어둬야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본 후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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