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다정한 아빠로 다가서는 법
아이의 일상에 동행하라
일요일 아침이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놀기만 하더니 3학년이 되어서는 미친 듯이 공부를 한다. 한주 내내 12시에 귀가했는데, 오늘도 학원에 가겠다고 10시에 깨워 달라고 했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깨웠는데, 아들은 피로가 안 풀렸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 10분만 더 자겠다고 했다. 10분 후에 깨워도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안타까우면서도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잠이 부족한 것 같아 30분쯤 더 재우고 아들을 깨웠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려고 차를 몰고 나왔다. 시간은 벌써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아들을 데려다준 후에 밥을 먹고 커피숍에 가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나는 책을 출간하고 싶은 마음에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평일에는 직장 일로 시간을 내기 힘들기에 주말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글을 쓰며,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은 내 삶과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치 있는 시간이다. 또한 내가 만든 세계가 책을 통해 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은 흥분되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주말에 집중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학원 근처에 오니 배가 고팠다. 나는 ‘브런치로 무엇이 좋을까?’ 생각하다가 아들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들이 처음 학원에 등록했을 때 학원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이 많아서 좋다고 하였는데, 최근에는 식당은 많은데 먹을 만한 음식이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음식을 자주 사 먹다 보면, 금방 물리게 되고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나는 아들에게 “아침은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었다. 같이 ‘밥을 먹자’라고 말하려다가 혹시라도 함께 먹을 친구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배려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바꿔서 물었다. 아들은 요즘은 혼자가 편하다며 학원 근처에서 먹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혼자서 먹을 거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까?”라고 물어보았다. 아들은 큰 기대 없이 “그래”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전에 아들을 기다리다가 학원 근처에 초밥을 파는 식당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초밥 어때?”라고 묻자 아들은 “오, 이 근처에 초밥 파는 곳이 있었어?”라고 되물었다. “초밥, 조오~치!”라며 아들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쳐있던 아들의 목소리가 상기된 것으로 볼 때, 메뉴 선정은 성공적인 것 같았다.
식당에 들어가니, 때마침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판매하는 점심 특선 메뉴가 있었다. 가격도 초밥치고는 8,900원으로 저렴했다. 나중에 아들이 혼자서 식당에 올 수도 있으니, 시험 삼아 점심 특선을 먹어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메뉴판에 특선 메뉴의 사진이 있었는데, 초밥 7 피스, 미니 우동 1 그릇, 양배추를 썰어 놓은 샐러드 1 접시, 크로켓 1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점심 특선은 어떻니?”라고 물었다. 아들은 메뉴를 쓰윽 살피더니 “좋아”라고 말했다. 나는 “일단 음식을 먹어보고 혹시라도 양이 모자라면 그때 가서 더 시키자”라고 말했다.
드디어 초밥이 나왔다. 우리가 주문한 초밥은 먹음직스럽게 보일 뿐만 아니라, 가격에 비해 맛도 훌륭했다. 나는 아들의 음식이 부족할까 봐 내 접시에 있는 초밥 한 점을 덜어 아들에게 건넸다. 아들은 맛있게 먹으며, 다음에는 혼자 올 수 있는 식당이 하나 더 생겼다고 좋아했다. 오랜만에 아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요즘 세대를 살아가는 아빠는 자녀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았다. 그러면서 ‘아빠는 자식의 기분 좋은 하루를 돕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답을 하며 혼자 가볍게 웃었다.
식당을 나서자 오른편에 신호등이 있었다. 아들의 학원은 길 건너 3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데, 아들이 “요즘은 어떤 글을 쓰냐?”라고 물었다. 나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신호대기 중에 답을 하려니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해야 할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신호대기 중에 이야기를 끝내려다 보니, 나는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내용을 매우 간결하고 축약해서 말을 했다. 그러다 보니 앞뒤 내용을 잘라먹어 내용 전달이 미흡했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아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말하던 내용을 끊고는 두어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오른쪽으로 비켜서며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정확히 어디를 갈 것이라고 마음먹지는 않았었지만, 내가 하는 행동으로 미루어봐서는 커피숍으로 가고자 했던 것 같았다. 나를 의식했는지 아들의 보폭이 줄었다. 아들과 거리가 벌어지려는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나는 지금 왜 이러는 거지? 어딜 가려고 멈춰 선 거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 주기 위함이었다. 나는 오늘 평소 얼굴도 보기 힘든 고3 아들과 오랜만에 식사를 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아들과 완벽한 오전을 보낼 무렵, 난데없이 횡단보도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돌아서려고 했다. 학원 입구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학원을 코앞에 두고 돌아서려는 나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급하게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대화를 종결하려는 것도 이상했고, 가는 길을 돌아서려는 나의 반응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이상함’을 직시하고는 방향을 틀어서 아들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약간 어색하기는 했지만, 아들은 나의 행동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아들을 학원까지 데려다주면서 나는 하던 얘기를 마저 끝냈다. 그리고는 집에 갈 때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커피숍에서 글을 쓰며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이 있었던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는 ‘횡단보도 신’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반복해서 돌아갔다.
나는 차분하게 내가 했던 행동을 분석해 보았다. 오늘 나의 오전 일과는 지극히 단순했다. 고3인 아들을 학원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는 것은 명목상 드러나는 행위이지만, 아들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나는 주어진 일을 대단히 잘 해냈다. 잠이 부족한 아들을 위해 늦잠을 자는 것을 기다려주었고, 공부하러 가겠다는 아들을 학원까지 데려다주었다. 또한, 식사를 하지 않은 아들을 위해 함께 식당에도 같다. 아들이 밥을 같이 먹을 친구가 있을까 봐 ‘아빠와 밥을 먹자’라는 말 대신에 ‘아침은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으며 아들을 배려했고, 뻔한 식사 대신 평소 잘 먹지 않는 초밥집을 떠 올린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게다가 아들이 추후 혼자서도 식당을 방문할 수도 있으니, 가성비 좋은 점심 특선을 주문해서 다음을 위한 연습을 한 것도 잘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식당을 나온 후에 ‘나는 왜 바쁜 일도 없었는데, 아들에게 말 한마디도 없이 횡단보도에서 뒤돌아서려고 했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내가 돌아서게 된 이유를 발견했다. 첫 번째 이유는 내가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식사 후에 곧바로 글을 쓰려고 했다. 아들과 식사했던 초밥집 바로 옆 건물에 주차를 해 놓았는데, 주차비를 면제받으려면 상가를 이용해야만 했다. 나는 상가에 커피숍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서는 주차비를 면제받으면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에 커피숖이 있는 그 건물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 같다.
횡단보도를 걷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욕구에 대한 존중을 받지 못했기에 한 번씩 튀어나오는 강력한 욕구를 제어하기가 어렵다. 그랬기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커피숍으로 가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들의 학원은 식당에서 3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특별하게 바쁘지도 않은 내가 고작 3분의 시간을 내는 것을 망설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가까운 거리이기에 마음의 부담도 없는 데에다 아들에게 좋은 아빠 노릇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좋은 기회인데 말이다. 아들을 데려다준 후에, 커피숍에 가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의 아버지의 양육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아버지와 살갑게 지내지 못했고, 원만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일방적인 데다 버럭 하는 성격의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서워서 늘 아버지 주변에서 머물렀다.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함과 모관심뿐이었다.
어린 시절이라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나는 감정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으로 학창 시절 내내 방황했던 것 같다. 우울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과하게 장난을 치기도 했고,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친구들에게서 받고자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기도 했다.
그 상처를 잘 알기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있다. 나는 아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 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고, 아들에게 좀 더 다정한 아빠가 되고 싶다. 부모라면 누구라도 자식과 이런 관계를 원하겠지만, 나는 이 부분에 좀 더 특별하다. 어린 시절 나를 억압하고 일방적이었던 아버지와 달리 아들과 친구처럼 편안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
아버지와의 관계 설정이 어린 시절부터 잘 못 되어서인지, 나는 아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게 서투르다. 애틋한 마음이 있어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당사자가 타인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사랑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행위도 아니고, 사랑을 전하는 방법에 관해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가끔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바로 오늘이 그런 경우이다. 나는 아버지와 따뜻한 이야기도 나눠 본 적이 없기에 공유하는 추억도 별로 없다. 그런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가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치는지, 나는 아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풀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아들과 좋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에 어색해하는 것 같다. 그랬기에 나는 아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던 횡단보도에서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밀쳐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행동 패턴을 내면화해서 아들과의 관계를 망칠 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과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놓칠 뻔했다. 아들과 대화하며 온 마음을 열어놓고 아들을 존중해 주는 바로 그 순간이 사랑을 전하는 순간인데, 나의 마음은 아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그 순간을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횡단보도에서 멈췄다가 다시 아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들을 사랑하겠다는 나의 의지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의 어색하고 이상한 행동을 늘 의심하고, 좀 더 성숙하고 다정한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오늘에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나는 오늘 삶의 커다란 교훈을 발견했다. 내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아들이 외롭지 않도록 따뜻한 동행의 길에 함께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함께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교감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과제는 일상을 살아가며 나의 한계를 발견하고 하나씩 바로 잡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빠가 아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 하며, 아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아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아빠가 곁에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이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전해주고 아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