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다 보니 나 되었다
“이게 내가 써본 것 중 최고였어!”
“이게 내가 먹어 본 것 중 최고야!”
“이게 내가 가본 곳 중에 최고야!”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 드는 질문은
‘몇 개나 써보셨나요?’
‘몇 개나 드셔보셨나요?’
‘몇 군데 여행 가보셨나요?’
대부분 생각만으로 끝내지만 정말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은 이런 반응이었다.
“왜 시비죠?”
“사람이 왜 이렇게 부정적이죠?”
나는 시비를 걸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질문에 부정적인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 아무런 의도 없이, 아무런 해석 없이
그저 문장 뜻 그대로 순수하게 궁금했다.
한두 개 써보고 나서 이게 내가 써본 것 중 최고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았고
한두 개 먹어보고 나서 이게 내가 먹어본 것 중 최고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았고
한두 번 여행해보고 나서 여기가 내가 가본 곳 중 최고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경험을 통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정도라면
나도 믿고 써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나도 믿고 먹어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나도 믿고 여행 갈 수 있을 것 같았을 뿐.
진짜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라고 말해봤자
나의 순순한 질문을 시비로 받아들였던 사람은
“이게 어디서 어른한테 말대꾸를 따박따박해!
너희 부모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어?"
부모님 안부까지 나누는 단계까지 거쳐야 했다.
"사과 안 해?!"
"제가 뭘 잘못했죠?"
결국 나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태도가 부족한 아이로,
언행에 거침이 없는 아이로 그들 기억 속에 저장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질문을 질문으로만 받아줬던 사람들은
새로운 일에 관심이 많은 의욕적인 아이,
밝고 명랑 쾌활하며 발표력이 왕성한 아이,
자기의 생각을 정확하고 조리 있게 발표할 줄 아는 아이,
주위의 현상에 항상 관심을 두고 있어 상식이 풍부한 아이,
생활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주위의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아이,
항상 질문을 잘하고 사고력이 풍부하며, 끝까지 알려고 노력하는 아이로 기억해줬다.
질문은 똑같았지만, 질문을 받아주는 사람에 따라
나는 착한 아이가 될 때도 있었고, 나쁜 아이가 될 때도 있었다.
난 착한 아이가 되고 싶지도 나쁜 아이가 되고 싶지도 않다.
난 질문을 통해 어떤 평가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니니!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지 말고
내 질문에 정확한 답만 해줬으면 좋겠다.
이제는 질문하는 게 무섭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아!
그래서 몇 개나 써봤다는 거야?
아직도 궁금해 죽겠네!
“호기심 천국 다시, 부활 안 하나?”
“호기심 천국이 사라진 아니라 호기심이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