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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nny Apr 03. 2020

가정주부는 “슈퍼 울트라 갑”

마트에서 꼼꼼하게 제품을 살피는 그들이 슈퍼 울트라 갑이다

한두해 전의 일이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전직 준비를 하던 중,

제조업을 하는 친구 K의 회사에서 한 달 보름 정도 일을 한 경험이 있다.

그 당시 친구 K사장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제조업자 입장에서 "진정한 슈퍼 울트라 갑은 가정주부란다!"

친구가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어느 날, 거래업체로부터 K의 회사로 전화가 걸려왔다.

거래업체에 하청을 준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는데, 불량품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지방 생산공장에 내려가 납품 전 검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K의 회사 측 제조라인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니, 불량품 발생 원인을 찾아내서 해결하고 그 결과를 알려달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친구 K의 회사는 대기업-하청업체(K의 거래업체)-재하청 업체(K의 회사)의 구조로 대기업 하청업체의 재하청 업체였다.

K의 회사는 중견기업으로부터는 직접 하청을 받고 있지만, 대기업의 경우, 요구 조건을 갖추기 어려워서 재하청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이런 구조에선 대기업이 "갑 오브 갑"이라고 생각했었다.


여하튼 친구 K사장과 함께 대기업의 지방 생산공장에 내려갔다.

거기서 우리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을 데리고 모든 완제품을 일일이 검수했다.

그곳의 납품 일정에 맞춰서 적게는 주 1~2일, 많게는 주 3~4일, 어떤 경우엔 주말까지 검수를 해야 했다.

거의 막노동 수준의 체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곳 직원들도 함께 검수를 했지만, 대부분의 검수 작업은 우리의 몫이었다.

검수를 마치고 납품을 완료한 후, K의 회사로 돌아와서 직원들과 함께 제조라인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는 노력을 수차례 반복했다.


이런 과정을 몇 주간 반복한 후, 내가 친구 K사장에게 말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우리 라인엔 문제가 없는 것 같은 데, 대기업 생산라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K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난 K에게 다시 말했다.

"사장이 직접 나서긴 곤란할 텐데, 내가 공장장을 만나서 우리가 아니라 이쪽 문제가 아니냐고 따져볼까?"


K가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만약 우리 측 잘못이 아니고 대기업 생산라인의 문제라고 밝혀질 경우, 그간의 소요 경비는 보전될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엔 더 이상의 오더는 따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후, 쌍방 간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주장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 사건이 잘 마무리된 이후, 1년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이후론 더 이상 불량품 검수를 위해 K와 그 직원들이 지방에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고 들었다.

오히려 대기업에서는 K의 회사 제조라인을 그쪽 지방공장으로 옮겨서 협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K의 회사는 그 대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아서 제조라인을 계속 돌리고 있다.

물론, 그때 검수를 해야만 했던 원인이 어느 쪽의 어떤 문제로 인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그 당시 우리는 갑을 관계에 대한 논쟁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겪은 상황에서 진정한 갑은 누구인가?


난 주장했다.

구조상 최상위에 있는 대기업이 당연히 갑이고, 그들이 하청업체에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라면 그게 바로 갑질이라고.

그때 우리는 매스컴에 간혹 나오는, 대기업 총수 일가 문제와 같은, 개인 차원의 갑질은 논외로 했다.


그때 친구 K 사장이 작지만 단호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진짜 갑은 따로 있다."


내가 누가 진짜 갑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가 말했다. "슈퍼 울트라 갑은 가정주부들이다." 왜냐하면 마트에서 그들이 물건의 하자를 지적하는 순간으로부터 우리의 고단했던 검수작업이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K의 논리는 이런 것이다.


1단계-제품을 고르던 중 불량품(?)을 발견한 주부가 마트 직원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2단계-마트 직원은 마트 점장에게, 마트 점장은 사장에게 보고한다.
3단계-마트 사장은 제품 생산 회사(대기업)에, 제품 생산 회사는 하청업체에게,
하청업체는 재하청 업체에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그러면 우리 같은 재하청 업체에선 전품목에 대한 납품 전 검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트에서 수천수만 개의 제품 중에 몇 개였을 불량품을 찾아낸, 꼼꼼한 가정주부야말로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슈퍼 울트라 갑"이라는 것이다.


마트에서 상품을 꼼꼼하게 제품을 살펴보는 가정주부


그리곤 내게 덧붙여 말했다.

마트에 진열된 제품에 하자가 약간 있더라도 그것을 먹거나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으면 그냥 사가자고 아내에게 말하라고.


아내도 내 친구 K사장과 어릴 적 동네 친구다. 아내에게 K가 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그 후론 나도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웬만하면 그냥 사 가지고 갑시다."




솔직히 이 글은 앞 단락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나도 K의 의견에 동의했고, 그의 말대로 실천했다. 그런데 글을 마무리한 다음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진짜 가정주부가 슈퍼 울트라 갑인가? 이런 경우, 정말 가정주부를 슈퍼 울트라 갑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사고의 폭을 더 넓혀 보았다. 관련 자료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아래의 몇 문단을 덧붙이게 되었다.




K의 주장은 무척 논리적인 것처럼 들린다.

마트에서 불량품을 찾아낸 가정주부의 "한마디"가 마트-대기업-하청업체를 거쳐 최말단 재하청 업체의 직원들이 지방에 있는 대기업 생산공장에 내려가서 완제품의 이상 유무를 검수해야만 하는 사태를 초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가정주부일 뿐, 최초의 원인 제공자라고 해서 가정주부가 슈퍼 울트라 갑이라는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갑은 계약 권리상 갑을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 갑이 을에 대해서 하는 특정 행동을 폄하해서 일컫는 말을 갑질이라고 한다.

위키피디아 백과에서 갑질을 검색해 보면,

"갑질"이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우월한 신분, 지위, 직급, 위치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행동을 말한다.


가정주부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서비스업 종사자의 구호 속에서는 최상위에 있다.


하지만 마트 직원이나 제품 업체와 계약 권리상 갑을 관계에 있지도 않고, 그들보다 실질적으로 우월한 신분, 지위, 직급,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상황에선 갑이 될 수 없다.





이 글을 쓴 이유는 "가정주부가 슈퍼 울트라 갑"이라고 말했던, 사랑하는 죽마고우 K사장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제조업계의 하청 구조라든지 그 계통에 종사하는 분들을 폄하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당시 그 친구는 우리가 을의 입장이라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하며 성질을 부렸던, 철없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했던 것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들리더라도 그 말이 때론 비논리적이고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개인의 관점과 성향에 따라서 동일한 사건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 한편으론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되면서 아이들 개학의 연기, 남편의 재택근무 등으로 가정에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있는 가정주부들에게 잠깐이라도 웃음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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