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 치유의 시작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가정·학교·직장 등에서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병영에서 발생하는 자살·탈영·총기 사고의 근본 원인을 파헤쳐보면 사고 관련자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단기간 심각한 충격을 겪는 경험만이 아니라 장기간 반복되는 부정적 경험도 마음의 상처인 트라우마(trauma)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어디서나 트라우마에 노출되어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많은 사람이 몸살감기를 앓는 것처럼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된다. 대한민국 사회도 위안부, 6.25, 5.18, 세월호 같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트라우마, 몸이 그 흔적을 기억한다. 사람의 뇌와 몸이 기억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세대가 트라우마를 기억한다. 그것은 개인의 건강한 삶과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마땅히 치유해야 할 상처다.
그리스어로 상처라는 단어인 trauma는 의학용어로 외상(外傷)이었지만 지금은 주로 정신적 외상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것은 예전에 겪었던 고통이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유사한 상황에 부닥치면 불안해지는 증상으로써, 사건 당시 상황의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며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 증세는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건 직후부터 나타나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 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납치·강간·폭행, 재난재해, 전쟁 등에서 비롯된다. 특히 대인관계로 인한 트라우마는 심각하고 광범위한 후유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가 가장 흔한 후유증의 하나라고 한다.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인 스마일센터의 자료에 의하면, PTSD는 주로 4가지 유형의 증상을 포함한다. 첫 번째, 사건에 대한 고통스러운 생각이 수시로 떠오르는 재경험이다. 사건이 지금 다시 벌어지는 듯한 느낌이나 악몽에 시달리고, 사건을 연상시키는 자극을 받거나 상황에 처하면 강한 심리적 신체적 반응을 보인다. 두 번째, 그 사건이 떠오르게 만드는 상황이나 사람, 특정한 물건이나 장소를 회피한다. 과거의 사건에 관해 얘기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일부러 바쁜 상태를 유지한다. 세 번째,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든다. 평소보다 더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지내고, 슬프거나 무감각한 상태가 될 수 있으며, 세상과 타인을 불신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평소 즐기던 활동이나 관심거리에 흥미가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네 번째는 초조함·불안감·긴장감이 들고, 잠을 자거나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늘 위험을 살피며 경계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과민 증상이다. 평소보다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는 과잉반응을 보인다. 만일, 자신이나 주변 동료에게 이런 증상이 몇 달간 지속되고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면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트라우마에 대해 알고 그로 인한 후유증을 치료하려면 먼저 트라우마와 마주해야 한다. 트라우마에 관한 이해를 돕는 책이 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안산 정신건강 트라우마센터장을 맡았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현수가 트라우마 바이블이라며 추천한 책이다. 1970년대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를 연구해 온 의학박사 베셀(Bessel Van Der Kolk)이 쓴 [The Body keeps the Score]의 번역본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이다. 보스턴 의대 정신과 교수인 베셀 박사는 보훈병원에서 전쟁을 경험한 환자들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관련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다. 역사적이고 임상적인 통찰과 과학적 사실을 결합하여 트라우마 환자의 삶에 대한 경외·존중과 연대 의식으로 혁신적 치료방식을 제시했다. 이 책이 개인과 사회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길 소망하며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누군가 읽고 트라우마에 관심을 두고 이해하고 관찰하게 된다면 그로부터 트라우마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트라우마는 우리 뇌와 몸에 흔적을 남긴다.
트라우마, 정신적 외상의 경험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인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범위가 방대할 수도 있고, 가족에게 밀접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며, 여러 세대를 거쳐 알게 모르게 어두운 비밀로 전해질 수도 있다. 그 경험은 마음과 감정에 흔적을 남기고, 즐거움과 친밀감을 느끼는 능력에 영향을 주며, 생물학적 특성과 면역체계에 자국을 남긴다. 즉, 트라우마는 우리의 뇌와 몸에 흔적을 남긴다.
트라우마는 환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근원이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극명하게 나뉜다. 정신적 외상이 된 사건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배우자와 자녀, 직장 동료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믿지 못한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그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 준 사건이 곧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원천이 되기도 한다. 트라우마가 된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릴 때만 자신이 온전히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자가면역질환을 유발한다.
트라우마가 있으면 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면역체계가 몸의 상태를 오인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 생긴다. 트라우마 환자의 편도체는 위기 상황이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반응한다. 부정적인 감정과 반응이 교감신경계를 과도하게 활성화해 질병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가면역질환은 대체로 원인이 불명확하다. 하지만 자가면역 질환자 중에는 어린 시절에 학대, 방임, 성폭행 피해를 입은 경우가 일반인에 비해 많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근친 성폭력을 당한 뒤에 자가면역질환을 앓는 안과 환자가 많다. 스스로 자기 신체를 공격해서 시력을 상실하는 홍반성 낭창을 앓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 다발성 경화증, 류머티즘 등 자가면역질환 환자는 어린 시절의 학대나 성폭행 피해와 관계가 깊다. 그들은 충동을 조절하는 신체 부위인 전전두엽이 발달하지 않아서 스트레스에 예민해지고 몸에 병이 생긴다.
트라우마 환자의 이상 행동은 뇌의 변화로 인한 것이다.
트라우마는 뇌의 경고 시스템을 재조정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과도하게 활성화하며 무관한 정보들 속에서 관련 정보를 걸러내는 시스템을 변형시키는 등 생리적 변화를 발생시킨다.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신체의 감정이나 느낌의 상호 전달을 관장하는 뇌 부위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변화는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이 힘들어지는 대가를 감수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위험을 지나치게 경계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들이 보이는 이상 행동은 윤리의식이 무너졌거나 의지력이 약화하였거나 성격이 나빠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징후가 아니라, 뇌의 변화가 발생시킨 결과다.
트라우마 사건 시 자기 행동에 과도한 수치심을 느낀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 가장 힘겨워하는 일 중 하나는 그 상처로 인한 증상이 나타나면서 과거 자신의 행동에 관한 수치심과 대면하는 일이다. 전투에서 적에게 잔혹한 행위를 하는 것처럼 그 일이 객관적으로 허가된 일이든, 학대받는 아이가 가해자를 달래려고 애쓰는 것처럼 그렇지 않은 일이든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 받은 고통과 마주하는 일도 괴롭지만,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자기가 한 일 또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수치심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어떤 환자는 양부의 가정폭력으로부터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 이들은 그 당시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 의존성, 흥분, 분노의 감정을 극도로 격멸한다.
트라우마 치유는 각자의 방식으로 하되 여러 가지를 조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생존자들이 온전하게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고 남은 삶을 건강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대화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재형성하고 환자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인지 및 이해함으로써 트라우마의 기억을 가공할 수 있게 도와준다. 둘째, 약물을 통해 부적절한 경계 반응을 차단하거나 여타 기능을 활용해서 뇌의 정보처리방식을 변화시킨다. 셋째, 트라우마로 인해 느끼는 무기력한 기분과 분노, 붕괴와 상반되는 경험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체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중에서 각자에게 잘 맞는 방식을 사용하되 한 가지가 아닌 여러 방법을 조합한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저명한 심리치료사 재스민(Jasmin Lee Cori)이 말했다. “트라우마는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우리 모두의 삶에, 그리고 온 세상에 가득하다. 사실 누구도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트라우마는 우리가 외면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찰해야 하는 대상이다. 트라우마는 ‘위험으로부터 살아남으라’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따라서 트라우마를 피할 수 없다면, 트라우마를 먼저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부터 시작해야 한다. 트라우마가 몸에 남긴 흔적,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 치유의 시작이다.
표지 사진 출처 : https://theconversation.com/3-trauma-takes-the-media-gets-wrong-157
* 이 브런치 글은 월간 [동원N예비군] 2021년 8월호 '나를 채우는 인문학' 코너의 여섯 번째 에세이입니다.
* 이 브런치 글의 글감을 제공해 준 초고입니다. https://brunch.co.kr/@yonghokye/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