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자 하는 곳에 속한다
인맥으로 이루어져 있는 통역자 세계에서 홀 열 단신 일본 유학만으로 프리 통번역자의 길을 가기에도 힘든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경력과 인맥을 꾸준히 쌓아가면 프리로 전향할 길은 있다. 어느 자리 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끈기와 포기하지 않는 정신만 있으면 그 자리로 갈 수는 있다. 먹고살 만큼 수입을 얻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전제해 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직 활동을 밥 먹듯이 되풀이하며 각종 노동 상담을 통해 한 분의 변호사에게 충분한 일본어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사법 통역자를 해 보라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들어본 적은 있는 사법 통역사! 과연 나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잠시 나의 도전 버튼은 눌러졌다. 일단 도쿄재판소에 전화를 걸어 사법 통역사가 되는 방법에 대해 문의했다. 그리곤 전문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전 나는 도쿄지방법원에 한일 법정 통역자로 등록하여 사법 통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사법 통역자가 되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해 본다.
‘법정 통역 핸드북 실전편 한국 조선어 (法廷通訳ハンドブック 実践編 韓国・朝鮮語)’ 이라는 책자를 구입한다.
- 재판의 흐름에 대해 이해하고 재판에 쓰이는 전문용어를 공부한다.
- 법정 용어를 외웠다면 다음으로 한국인 피고인의 공판에 방청을 간다. 재판의 방청은 공개이므로 한국 피고인 재판일만 알아두면 방청하러 가면 된다.
- 방청한 내용을 감상문으로 적어 도쿄지방재판소 관할 부서에 제출한다.
- 제출한 방청문을 토대로 재판관이 검토하여 서기관을 통해 인터뷰 일정의 전화를 받는다.
- 인터뷰 날이 되면 정해진 시간에 도쿄지방재판소 회의실로 가서 인터뷰를 받는다.
담당 재판관과 서기관 앞에서 면접 식으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받는다.
- 그다음으로 테스트가 있다. 4용지에 한국어/ 일본어로 각각 작성된 형사 사건 기소장 내용이 적힌 자료를 건네받는다.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힌 내용을 번역하여 구두로 통역한다.
- 마지막 테스트로는 시청각 TV로 검찰관이 일본어를 하고 피고인이 한국어를 한다. 일본어는 한국어로, 한국어는 일본어로 차례로 통역한다.
- 테스트 결과는 즉석에서 서기관이 합격 불합격 여부를 알려준다.
책자를 통으로 외우면 테스트는 통과할 수 있다.
사법 통역은 일본 국가에서 운영하는데 해당 언어 피고인 사건이 발생하면 서기관으로부터 사건 의뢰를 받는다. 내가 지금까지 의뢰받은 사건은 간단한 형사 자백 사건으로 공판은 30분 정도로 스피디하게 진행하여 끝난다. 사건이 끝나면 교통비와 통역비를 재판소에서 은행계좌로 넣어 준다. 다행인 건지 한국인 피고사건은 많지 않다는 게 서기관의 말이다.
프리랜서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수주를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최근에는 방송국에서 통번역도 시작하게 되었다. 정치적 이슈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유명 스포츠 선수 인터뷰 내용 번역 등으로 프로그램 디렉터가 리서치를 부탁하기 위해 단발적으로 에이젼시에 의뢰한다. 여기서도 에이젼시에 등록해 두고 스케줄이 맞는 통역사에게 부탁하는 식으로 일감을 받는다. 가끔씩 알바 수준으로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프리 통번역사는 가난하다. 방송국에서 디렉터에게 인정받아 지명이라도 받으면 조금 더 불려 가겠지만, 내 수준은 수많은 통역 등록자 중에서 스케줄 널널하니 시간 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 레벨이다.
참고로 기업에 소속된 통번역 사원의 업무에 대해 언급해 둔다.
◆통번역 사원의 주된 업무
기업에서의 통역은 주로 본사 출장자 및 주재원과 현지 채용 일본인과의 의사소통을 돕는 사내 통역과 거래처와 본사 기술자와의 사외 회의 통역이 주된 업무이다. 번역 작업인 경우에는 일본 현지 정부의 보도 내용 및 동향 리서치 번역, 전문잡지 번역, 일본경제 및 주요 신문 기사 내용 요약 번역, 현지 영업사원의 영업 자료 번역 및 본사 사원과의 메일 내용 번역 등등. 기업과 담당부서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기업에서 바라는 통역 사원의 스킬
회의 통역은 분위기 파악과 눈치, 센스를 더 필요로 한다. 배경 지식이 필요한 기업 통역은 통역자에 대한 배려와 인식이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 현실이다. 특히 전문적인 회의 내용은 알아듣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이 부분도 그저 통역자의 역량이다. 자료를 미리 읽어 보기만 해도 전문용어에 대한 대응이 비교적 빠를 수 있는데 아시다시피 한국계는 자료를 회의 시작하기 직전까지 업데이트를 거듭하기 때문에 자료를 미리 받아보는 것도 힘든 실정이다. 또한 발화자의 정리되지 않은 말을 전달해야만 한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들은 한국인들끼리 하는 대화 내용을 궁금해하기 때문에 전달해야 하는 게 통역자의 업무다.
이래저래 전직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덧 나이도 40대 중반을 넘었다. 안정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녀 마음과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나는 갱년기와 불면증, 만성 우울증까지 겹쳐서 오게 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갔고 더더더를 외치며 나를 채찍질하며 살아온 10여 년의 삶이다. 나를 돌봐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운동은 가끔 살이 올라오면 요가나 수영을 하기도 했지만, 근력운동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근력운동 웨이트를 한번 접해보니 그 매력에 푹 빠져 지금은 선수 데뷰까지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