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20대 인생 바닥 꼭짓점 찍기
당시 내 성적과 가정 형편에 맞추어 들어간 학과는 생명과학과였다. 뉴스에서 앞으로 각광받는 미래 분야라고 했고, 이과였던 나는 물리와 화학은 더 싫었기 때문에, 큰 망설임 없이 전공을 선택했다.
지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공부가 주 일상이었던 나에게, 서울이라는, 그리고 혼자 만끽하는 자취 생활이라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수업 땡땡이, 학점 바닥, 술 마시고 다음날 시험 안 보기, 시험 공부하다 월드컵 경기 보러 뛰쳐나가기...
결국 F 학점을 받고 장학금과 생활비가 끊기며 겨우 정신은 차렸다.
하지만 생명과학을 전공해서 앞으로 뭘로 먹고살 수 있을지는 막막했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된다는 친구와, 전공과 상관없이 성우가 되고 싶다는 친구, 당시 한참 유행이었던 의학전문대학원을 가서 의사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친구들까지... 모두 졸업을 앞두고 진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학원에 다니는 선배로부터 대학원에 대한 진로를 소개받았고, 사회인으로서의 진로 고민을 2년이나 미룰 수 있다는 생각에, 덜컥 3학년말 겨울방학부터 대학원 실험실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친구들이랑 술 먹고 노는 시기가 끝나고 다들 취업에 매진하면서 자취생으로서 외로움이 찾아왔었는데, 마침 실험실에서 밤낮없이 연구하고 일하는 선배들에게 처음으로 '실험'이라는 것도 배우고 실험실에서 같이 생활하며 즐거웠다.
대학원은 나에게 기숙사의 이미지가 떠올랐던 곳으로, 언제든 가더라도 누군가는 실험실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연구할 게 많으면 밤새서 실험하고 있었겠냐만은, 그때는 그 모습도 소속감의 일원이라 생각되어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저렇게 실험하면, 생명과학과 학생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인 연구원이나 교수가 될 수 있겠지 하는 상상을 했다.
그 꿈이 박살 나고 악몽이 시작된 건, 석사 졸업 논문 심사를 6개월쯤 앞두고 중간발표를 했을 때였는데, 그야말로 왕창 깨졌다. 돌이켜보니 사수 선배가 알려준 대로 실험 자체는 해왔지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실험만 하고 있다가 내 논문 주제가 뭐고 이걸 통해 뭘 증명하고 싶은지조차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졸업이나 할 수 있겠냐는 교수님들의 코멘트를 듣고 혼자 옥상에 올라가서, 5층에서 떨어지면 죽을까 아니면 그냥 다치고 끝날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후로 밤을 새 가며 논문 결과를 위한 실험을 열심히 했지만, '내 생각'이나 '내 의지' 같은 건 없이, 이 실험을 '왜'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없었다.
교수님이 불쌍하게 생각하셔서 어찌어찌 졸업을 하며 대학원을 탈출했고, 지금은 꿈꾸던 연구원이나 교수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때 배웠던 지식을 잘 활용해서 지금까지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connecting the dot'은 인생의 평타나 좋은 것만 연결하는 게 아니라, 바닥 꼭짓점도 다 연결해서 지금의, 그리고 미래의 인생을 그려나가는 거더라.
대학원에서의 잊고 싶었던 내 인생 첫 실패도, 지금의 내 진로와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쳐 업무를 해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내가 다른 선배나 동기들과 다르게 대학원에서 실패를 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Why'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Why'는 인생의 가장 큰 동력으로, 파도에 배가 흔들리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키인데, 나는 'How'는 어찌어찌 배워서 알고 있었지만 나만의 'Why'가 없었기 때문에, 실험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던 것 같다.
아니, 간절히 실험하고 원하는 결과를 내며 교수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야 될 이유 자체가 나에게는 없었다.
지금 나는 회사생활을 하며 '내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매일 생각하지만, 대학원에서는 실험 기술만 아는 테크니션이었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실험 설계부터 고민하는 '과학자'는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지금 방황하고 있다면, '직장인 사춘기'라는 책 제목에 이끌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보자.
"당신은 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이 꼭 거창한 사명이나 인류애일 필요는 없다.
아주 작게 보이는 대답이라도 나만의 'Why'를 발견하고 내가 이 일에서 좋아하는 것을 답할 수 있다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꽤 '괜찮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