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시월의 마지막 날, 집 앞 오분 거리에 있는 카페로 사목사목 걸어 나와 올해의 첫 뱅쇼를 홀짝인다. 세상 맛이 없는 와인향의 음료.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십팔분, 벌써 사위가 어두워진 지 오래다.
지난밤 열두 시경부터 다시 열이 올라 콧물과 가래로 힘들어하는 딸을 돌보며 일요일 오전을 보냈다. 아기가 낮잠을 자는 동안은 커트러리와, 물컵, 머그잔 같은 것들을 군침을 꿀꺽 삼키며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두근두근 즐거워했다. 그리고는 이 솟구쳐 오르는 물욕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시작된 것인가, 혹시 어떤 결핍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짧은 낮잠을 잤다. 어떤 물건이든 집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나면 물건을 살 때 분명 같이 주문했었던 내 일상을 반짝이게 해 줄 행복감 따위는 빛의 속도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올해엔 유달리 공기가 일찌감치 차가워지고 있는 것이다. 늦가을 오후, 상념에 잠기게 하는 오렌지색 햇빛이 점점 푸르게 어두워지고 아늑하게 들을 채우던 벼들이 슬슬 사라져 가는 것을 보노라면, 따뜻한 색으로 모습을 바꾸고 잎을 떨구는 나무들을 한 두 주 정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러면 말이다. 아 겨울이야. 겨울이 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불에 덴 콩 마냥 머릿속에 떠오른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겨울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게 된다.
겨울이 찾아오는데, 그럼 겨울 준비를 해야 하는 게 마땅하니 나는 다시 두툼하고 양손바닥에 찰 만큼 큼지막한 -장바구니에 담은-머그를 떠올리고, 그 손바닥에 전해질 뜨끈한 느낌을 생각한다. 물 얼룩이 좀 져있는 편이 더 기분 좋을 -아까 본 그- 커트러리로 투게더 빛 묵직한 접시에 빵을 버석 썰어내는 상상을 한다. 그래, 역시 꼭 필요한 물건들인 것인가. 생각하며 스스로 멋쩍어한다. 다소 어리석고 멍청이 같은 이 상태를 좀 더 즐기기로 한다. 계절의 변화에 어쩔 줄 모르고 울렁거려하는 것,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자연의 변화를 올해도 섬세하게 느끼며 즐거워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딸이 잠들고 나면 이 향신료 냄새가 과한 설탕물 뱅쇼 말고, 집에 가서 퍼석해진 과일이라도 잘라 와인에 넣고 바글바글 끓여보리라 생각한다. 계피라면 질색인 남편을 위해 정향과 팔각, 귤, 사과 정도면 훌륭하겠다. 그러고 나면 아가가 앓는 동안 먼지 내음이 쌓였을 우리 집에 겨울 냄새가 따듯하게 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