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6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라졌지만 남겨진 것들

<산불로 사라진 천년의 기도>

by 차유진 Mar 26. 2025
전소되기전 고운사 전각전소되기전 고운사 전각

며칠 동안 타오르고 있는 불은 사람도, 시간도, 기억도 모두 삼키며 재를 토해 놓았다.

천년고찰이라 불렸던 고운사의 불타버린 전각을 화면 너머로 바라보는데, 왜일까 마치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평온이 사라진 것 같다


한순간의 불길 앞에 수백 년이 사라지는 걸 보면서,

나는 묻고 싶어졌다.

우리는 과연, 이 비극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전쟁도 아닌 시대, 누가 일부러 파괴한 것도 아닌데

수백 년을 품고 있던 시간들

불 한 줄기 앞에서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사라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특히 고운사처럼 사람들의 기도와 발자국이 수없이 쌓인 공간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흩어졌다는 건 마치 영원할 거라 믿었던 것들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우리에게 정면으로보여준 것 같아 무서움이 배가 된다.


이런 감정은 그냥 ‘산불이 났다’, ‘문화재가 소실됐다’라는 뉴스 이상의 일로 남는다.


그 장소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우린 마음으로 그 장소와 풍경을 오래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게 사라진 지금,우리 안의 어떤 기억되지 못한 감정들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더 슬프고, 더 아쉽다.


그곳이 고향인 사람에겐, 아닌이들보다 더한 상실감이 찾아올테고, 꼭 고향이 아니어도 그곳의 공기, 그 풍경에 위로받은 사람들에겐, 추억과 시간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결이 다른...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았던 또 다른 장면이 있었다.

산이 불타고,

하늘에선 생명을 걸고 물을 실어 나르던 그 시간

땅에선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  


소방 헬기 앞에 공이 날아다니는 풍경 앞에서

나는 마음 깊이 씁쓸함을 느꼈다.

그 간극이 너무나 커서,

그 태연함이 너무나 멀게 느껴져서—

속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건 단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사회가 가진 간극.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버린, 각자의 세계.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나의 뒤에서

내가 그들을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도 어느새 그 간극의 한 편에 서 있는 건 아닐까.

그 씁쓸한 풍경 한가운데서,

틈 사이에 끼어버린 내가 있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그렇게 나는 꺼지지 않은 불을 바라보며,

여러 감정을 오가고 있었다.

슬픔, 분노, 부끄러움, 그리고 다시 슬픔.


자연의 재해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또 그 무력함을 핑계로 부끄러움조차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무심해질 수 있는지.




모든 건 사라질 수 있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하지만 저런 방식이어선 안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불이 타고 있다.

그 불길 한가운데, 누군가의 기도와 기억도 함께 타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 그렇지만

불은 결국 꺼질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남은 검은 흔적들 속에서

우리는 돌아보고 질문을 찾아야겠다.


우리가 이 비극 앞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지키지 못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무엇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기억하는 존재인지.


많은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아직 잃지 않은 것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지금을 기록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한 내가,

적어도 느꼈다는 사실만큼은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산불 #고운사 #상실 #기억 #자연재해 #문화재 #감성에세이 #시사에세이 #사회적 시선 #기록하는 사람 #조용한 시선 #감정의 틈 #사라짐과 남겨짐 #천년고찰 #전각 #전소

월, 목 연재
이전 01화 생각의 틈, 감정의 틈 서문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