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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Oct 20. 2023

볼보이에게 배운 것


  하늘은 맑고 초록빛의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하는 걸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운영하지 못했던 학생들의 스포츠 클럽 활동들이 활기를 되찾고 있나 보다. 딸아이는 용건이 있는지 벌써 몇 번째 전화가 온다.


“엄마 내일 학교에 배구 대회가 있는데, 아빠는 내일 바쁘시데.... 나는 9시까지 학교에 꼭 가야 하는데...”


  이런 때일수록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한껏 들뜬 목소리와 텐션. 기분을 망치게 둘 순 없지. 아침 일찍 학교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다. 집에 가서 자세히 이야기하자며 통화를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내내 생각했다. 키도 크고 운동 실력도 뛰어나서 눈에 띄는 배구 유망주가 된 것일까? 나는 선수도 아닌데 나조차도 흥분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마음만은 ‘김연아 선수’의 어머니 못지 안다며 김칫국까지 마시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처음으로 받은 유니폼을 보여주며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등판에 적힌 이니셜을 보니 실감이 났다. 아이는 중학교에 진학하고부터 배구를 시작했다. 딱히 운동에 진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교생활에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이의 배구부 활동을 지지해 주었다. 이제 겨우 6개월 남짓, 여름방학 기간을 제외하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아이가 잘했으면 하는 욕심이 자라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볼보이라고?”


“엄마, 볼보이라니, 정확하게 말하면 볼 걸(ball girl)이야. 그리고 볼보이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거는 뭐 쉬운 줄 알아? 나 아직 1학년 밖에 안 됐거든 그리고 여름방학 때 연습도 안 나갔는데..... 2학년, 3학년 선배님들도 많은데 나까지 차례가 오려면 아직 멀었어! 그리고 엄마는 경기에서 볼보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나 해? ”

  

  볼보이 발언에 발끈한 아이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 포지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배구에 문외한이 알 턱이 없었다. 솔직히 볼보이는 공만 주워 주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주전 선수는 아니더라도 후보 선수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속상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명색이 첫 대외경기인데 나보다 더 속상했을 아이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것은 나의 대단한 착각임을 알게 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는 볼보이에 대해 의연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은 경기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마음은 배구부 지도 선생님과 선배, 동기들로부터 얻은 믿음과 신뢰 같은 것이었다. 그제야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나는 멈칫했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녀에게 꼭 가르쳐야 할 인생관이 있다면 아마도 ‘성실’이나 ‘인내’, ‘책임감’, ‘자존감’ 같은 단어였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최고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다’라는 덕목이었다. 딸의 배구 시합에 들떠 주전 선수가 된 것 마냥 혼자서 마음속에 욕심을 부리고 있던 나와 다르게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은 일도 책임을 가지고 하면 얼마든지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경기 날 아침 아이가 유니폼을 근사하게 입고 집 밖으로 나와 포즈를 취했다. 더 이상 볼보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어떤 선수보다 멋진 아이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우리 딸 멋지네, 오늘도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오렴. 엄마가 응원할게”


  누군가는 가을이 결실의 계절이라고 한다. 봄날의 내리쬐는 햇살도 여름의 열기와 비바람도 이겨낸 우리는 훌륭한 열매를 기대한다. 하지만 조금 작은 열매라 할지라도 심지어 열매를 맺지 않아도 괜찮다. 열매만큼이나 중요한 것을 자라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으니까.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누구보다도 이 계절을 만끽하고 있는 우리, 우리는 이 가을 볼보이 아니 볼 걸로부터 배운 삶의 의미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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