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매번 후회한다. 간암에 걸려서야 진작에 끊지 못한 담배를 후회하며, 병을 얻고서야 건강에 소홀했던 과거를 후회한다. 일에 파묻혀 아이들에게 소홀했다며, 좀 더 같이 있었어야 했다고 이미 지나간 시간을 후회한다. 과거 행위에 대한 후회가 자책이라면,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아쉬움이다. ‘외국어를 배워볼 걸’, ‘책을 평상시에 읽을 걸’, ‘좀 더 과감해볼 걸’ 부단히 내면에서 새어 나오는 진심을 외면했다며, 사랑하는 이에게 그러지 말기를 주문한다. 특히 삶을 되돌아보는 나이가 되면 후자, 시도하지 못했던 것들의 후회가 더 짙게 몰아친다고 한다.
시도하지 않았던 과거는 긁지 않은 복권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얇게 덮인 은색 판박이를 긁었다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을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걸 했었어야 했는데’ ‘그때가 적기였는데’ 현실은 갈수록 퍽퍽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실행에 옮기지 않은 그때의 나에게 소리치고 싶다. “그래. 그걸 하라고!”
시작이 어려운 이유는 현실적 상황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돈과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빠듯한 살림에 먹을 것 입을 것을 줄이고 있는 마당에 쉽지 않은 결정이다. 새로운 걸 하려면 무언가는 그만해야 한다. 정신적 육체적 노동과 그에 따른 고단함도 동반된다.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굳이 다른 고단함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악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도달하고 싶은 수준이 있다. 기타를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 사람은 쉬운 포크송 한곡을 치는데 한 달을 공양해야 한다. 수준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어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석 달 정도의 농축된 학습이 필요하다. 그때까지 잘 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어깨를 으쓱 일 재능이 있는지 모르겠고, 재능을 발화시킬 만큼 노력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지금 하는 시도가 헛발질일까 봐하는 걱정 때문이다. 돈과 시간을 들여, 목표를 이루겠다는 정신적 무장까지 했지만 여전히 시작이 두려운 것은,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다. ‘기타가 경력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태국어를 배우고 싶지만, 전혀 도움되지 않을 테니 중국어를 배워야겠어’ 같은 내면의 갈등이 한번 일어나면, 희생될 재화와 미래의 예상 수익 간의 이해타산 불일치가 발생한다. 그저 흥미로는 배울 수 없다. 할까 말까’라는 생각을 몇 달 동안 계속하다가 결국 시작하길 포기한다. 나는 이것을 ‘시작의 공포’라고 말한다.
이처럼 새로운 도전이 어려운 것은 확실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이 과연 경력에 도움이 될까? 영어, 중국어, 코딩, 데이터 큐레이팅 등을 배우면 삶이 좀 나아질까? 하루 자고 난 다음의 세상은 어제보다 한 발자국 멀리 나가 있고 산업의 방향조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마당에, 오지 않은 세상에 도움이 될만한걸 콕 집어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예측한다 해도 관련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후죽순 늘어나 가치가 떨어질 수 있고, 전혀 다른 기술이 나타나 지금까지의 경력이 휴지조각처럼 가치가 폭락할 수 있다. 그러니 미래를 선도할 확실한 무언가를 알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시작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다. 매일 이어지는 야근 때문에 저녁시간을 낼 수 없는 사람이 오후 직장인 영어반을 끊어서는 안 된다. 영어학원만 배 불리는 셈이다. 건강보험료가 몇 달치 밀렸는데 바이올린을 배울 수 없다. 한정된 재화를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커리어와 연결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에는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같은 고민을 안고 산다.
문제는 시작도 포기도 하지 못하고 걱정만 하는 것이다. ‘이걸로 이직할 수 있을까?’ ‘이걸로 프리랜서로 나가면 얼마나 벌까?’ 시작도 안 하고 끝을 고민하는 것은, 게임기 앞에 앉아 ‘첫 판에 죽으면 어떡하지?’ ‘왕을 깨고 이니셜은 뭐라고 적을까?’라고 생각만 하고서는 동전을 넣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며칠 몇 달 동안 생각했음에도 포기하지도 시작하지도 못했다면, 그건 생각만으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럴 땐 행동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2016년 10월 5일,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날이 결국 왔다. 가족들과 나는 인천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나이 든 아들이 걱정되어 꼭 잡은 손을 통해 떨리는 어머니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진동은 나의 떨림과 합쳐져 차 안의 공기마저 흔들었다. 무려 4년 반을 고민하며 준비했다. 외국어를 공부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외국에서 해볼 만한 사업 아이템과 혹시 한국에 돌아와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 글쓰기, 영상편집 등등등. 그럼에도 미지의 공간에 발을 내딛는다는 것이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운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차창에 비친 경직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인천대로를 빠져나오자 밀려드는 차들로 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순식간 드는 말도 안 되는 상상,
‘살짝 접촉사고가 나면 안 될까?’
비행기를 놓치고 겸연쩍은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여는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그때까지만 해도 언제든 오라는 팀장의 말을 믿었다. 순진하게도-. 여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스페인어와 인도네시아어가 남았고, 내 잘못이 아니었으니 아쉬운 표정 몇 개만 지어주면 됐다. 창공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 중 하나만 타서 떠나면 그만인데 시작의 공포 앞에 움츠려있었다.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80리터 가방을 들쳐 메자 어색함이 넘쳤다. 은색의 잘 닦여진 두 개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숫자 1과 2가 쓰여있는 문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문 뒤에는 각각 천국과 지옥이 있고, 비행기에 타는 순간 벌어질 미래가 두려웠다. 삼십오 년 하고 십 개월 동안 이뤄놓은 것들을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었다. 꿈을 찾아간다지만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 앞으로 나가는 미지의 공포 앞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대부분은 여기에서 뒤돌아간다.
떨리던 몸을 비좁은 좌석에 B2에 몸을 뉘었다. 쏟아지는 긴장 때문인지 피로가 몰려왔지만 쉬이 편해지지 않았다. 비행기 엔진이 돌아간다. 거짓말처럼 떨림이 멈추고 안정되기 시작했다. 모두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곳에는 상당한 양의 두근거림도 있었던 것이다. 용기를 내자 두려움 뒤에 숨었던 두근거림이 드디어 얼굴을 내밀었다.
이빨 몇 개 빠진 톱니바퀴 같은 삶에 여행이 필요함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노력했고 선택을 믿었다. 하지만 노력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혹시나 준비 기간이 짧지는 않을까, 이 선택이 비극이 되지는 않을까, 돌아와서 여행을 후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빠지자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하여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지금 하는 고민들은 순간의 모호함을 모면하고자 하는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니 딱 한 발자국만 내딛기로 했다. 설령 계획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동안 버킷리스트라고 부르짖었던 목표에 힘껏 팔을 뻗어보고 싶었다. 그때 알았다. 한 발짝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벽이 아니었다. 그저 문지방에 불과했다.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가 볼 수밖에 없다. 결국 해봐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아이를 낳아야 고통을 알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만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우울증을 겪고 나서야 그들의 끝도 모를 감정의 구렁텅이를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걸 먹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을 이루는 대부분의 깨달음은 경험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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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안티구아는 과테말라에서 가장 걸어 다닐 맛이 나는 도시다. 도로에는 수박만 한 돌들이 몸통이 박힌 채 머리만 빼꼼히 내밀고 있다. 돌 위를 ‘덜덜덜’ 소리 내며 달리는 자동차 덕분에 어느 방향에서 차가 오는지 알고 길을 내줄 수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경적을 올릴 이유가 없다. 이곳은 과테말라에서도 저렴한 편이기에 많은 여행객들이 스페인어를 배우거나 과테말라 요리를 배우며 장기간 머물기도 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또 있다. 아까떼낭고 Acatenango 때문이다.
불의 고리에 위치한 과테말라에는 여러 활화산이 있으며 그중 아까떼낭고는 안티구아를 지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어떤 필수 통과 의례와 같다. 그 이유는 영화 ‘폼페이’처럼 산봉우리에서 터지는 화산과 흐르는 용암을 생생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화산 폭발 다큐멘터리를 틀어놓은 듯 눈앞에서 태고의 신비가 펼쳐진다.
산봉우리에서 ‘피슉’하며 회색의 말풍선이 삐져나온다_본문 中
이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다른 이유는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의 등산 난이도다. 적당한 높이 3976m의 산은 마음의 준비도 할 새도 없이 턱을 치켜들어야 보이는 가파른 길로 등산객을 몰아세운다. 잠시 산을 즐길 평평함은 없다. 계속 오를 뿐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산에 익숙했고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산들을 경험했음에도, 가장 힘들었던 산을 꼽으라면 이 산을 꼽겠다. 등산 실력을 시험해보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힘든 원인은 사토沙土다. 해변의 모래들이 화산 폭발에 놀라 이곳으로 달아나 부락을 이룬 건지, 산 길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흙이 깔려있다. 힘을 내어 한 발짝 내딛으면 반발짝 밀린다. 괜스레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짜증이 솟구치기도 한다. 산 정상에서 하룻밤 지내기 위한 식량과 텐트 등의 물건들을 나눠 짊어지고 산 중반에서 나무를 가방에 결박시킨다. 등산객들이 많은 탓에 정상에는 불을 지필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웬만한 2박 3일 짐보다 무겁다. 몸에 흐르는 수분을 다 빨아먹은 모래땅은, 겨우 옮긴 등산스틱을 끌어당겨 몸속 에너지마저 뽑아먹는다. 거기에 고산병까지 왕림하시면 지옥문이 열린 것과 다름없다.
유명세에 비해 산에는 적막감마저 흘렀다. 예약의 절반 이상이 취소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과테말라 대학생 세명이 이곳에서 실종되었다. 점퍼 하나만 들고 올라간 청년들을 나무라듯, 산은 비를 뿌렸고 어두워진 산속에서 길을 잃어 결국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것에 집중했다. ‘충분한 준비와 가이드 없이 오른 산은 위험하다’가 아니라 ‘아까떼낭고는 위험하다’로 말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투어를 취소했지만 나는 산을 타기로 했다. 산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아까떼낭고에서 관광객이 죽다
고산병이 도져 세 걸음 걷고 5분을 쉴 정도로 힘든 산행 끝에, 불 화산 Volcán de Fuego이 눈에 들어왔다. ‘두둥’하고 지축이 흔들리면 3km 밖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먼지가 산신령의 등장을 알리듯 산을 감싼다. 과테말라 천만 대군이 지나가듯 강렬한 진동과 먼지가 희미해지면 산봉우리에서 ‘피슉’하며 회색의 말풍선이 삐져나온다. 그리고 한여름 새빨갛게 익은 짓이긴 토마토가 믹서기에서 토해지듯 용암이 사방으로 퍼진다. ‘여기까지 왔으니 상을 주겠노라’며 붉은 자태를 뽐내는 화산을 보고 있으면, 살을 에는 추위에 발가락이 닭처럼 접혀있고 팔짱을 끼고 있느라 어깨가 결린다는 것쯤은 까맣게 잊는다. 언제나 이런 장관을 보게 되면 드는 생각은, 너무도 진부하지만, 역시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으니 상을 주겠노라’며 붉은 자태를 뽐내는 화산을 보고 있으면_본문 中
직장을 다니면서 코딩 수업을 들었다. 오전 아홉 시 반에서 오후 다섯 시 반 까지 이어지는 토일 종일반을 6개월 동안 다니고 깨달은 것은, 이 방면에 눈곱만큼의 재능도 없다는 것이다. 나에겐 이 복잡한 삶을 0과 1로 구분할 수 있는 단호함이 없었다. 어플 하나 만들 수 없었지만, 그 6개월은 손해도 잃어버린 시간도 아니었다.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컴퓨터 직종에는 발을 들이지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었다. 노력에는 자신 있었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코딩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 –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하는 것이 낫다.
시작과 시련은 주인과 개다. 모든 시작에는 시련이 뒤따른다. 시련을 극복하는 시기는 다를 수 있으나 누구도 그 시련을 비켜갈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이 두렵다. 의미 없는 도전이 되어버릴까 봐 아무것도 안 하는 중용을 택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보드라운 코스모스가 뿌려진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가시가 바싹 선 장미가 뿌려진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누군가 이미 밟고 간 코스모스는 고통스럽지 않겠지만, 이미 짓이겨져 향기마저 사라진 보상 없는 길이다.
자신의 길을 만들려는 사람은 장미 줄기에 사납게 돋아난 가시를 밟고 지나가야만 한다. 그러려면 먼저 길 위에 서야 한다. 그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 생각지도 못한 고난을 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길은 원했던 보상을 내어주지 않을지 모른다. 누구도 선택을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고통 없이는 성장할 수 없고 시작하지 않으면 고통은 없다.
코딩이 유망하단 생각만 하며 시도하지 않았다면, 나는 과거에 시도하지 않은 코딩의 악령에 휩싸여 과거를 아쉬워하며 여전히 시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포기했지만 이득이었다. 시작은 두렵지만 어떤 식으로든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