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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언니 Aug 09. 2021

개밥 차리는 여자

5일간의 입원 치료를 마치고 집에 온 날. 아픈 슈렉이의 슬픈 표정.


췌장염으로 치료를 받다가 퇴원을 한 후, 사료를 바꿨다. 췌장염에는 기름기 있는 음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지방을 쏙 뺀 환자식을 먹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환자용 사료를 먹던 첫날 식탐왕 슈렉이는 사료를 남겼다. 마치 아침부터 삼겹살을 구워 먹는 고기 러버인 사람에게 채식을 해야 한다며 풀떼기만 준 정도의 충격이라고 하면 될까.


‘사료는 어떤 재료로 만드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연식으로 차려주는 것이 최고다.’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강아지는 강아지 사료만 먹어야 한다. 사람 먹는 것을 먹으면 사람 걸리는 병에 똑같이 걸린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라 그동안 슈렉이는 사료만 먹고 자라왔다. 내 집에서 키우지도 않을뿐더러 양육비도 내지 않고 있는 터라 강하게 주장을 펼칠 수 없었던 나는 몰래몰래 슈렉이에게 사과, 파프리카, 생 닭다리 등을 사다 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생 닭다리 뼈까지 오도독 씹어먹는 5살 슈렉이. 5살이면 한창 고기 좀 뜯을 나이, 아니 뼈도 씹어 먹을 나이.


그런데 11년 견생 처음으로 사료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신 엄마는 그날로 동물병원에 가셔서 개당(=끼니당) 7,000원짜리 습식사료 캔을 사 오셨다. 미식가 슈렉이는 맛있는 것은 귀신같이 알아서 그것은 잘 먹었다.


캔의 영양성분표와 내용물을 가만히 보니 쌀, 닭고기 등으로 만든 죽의 형태였는데, 이 정도면 내가 만들어 먹일 수도 있을뿐더러 내가 만드는 것이 각종 첨가물 걱정 없이 더 건강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비용적인 면도 부담이 되었다. (끼니당 7,000원이라니……) 나는 집에서 한 끼도 차려먹지 않는 ‘보통의’ 직장인이지만 강아지 아들이 밥을 안 먹는다니 요리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존에 먹던 건사료(좌) 최근에 바꾼 맘스타일 홈메이드 습식사료(우)


내 주방에는 식재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강아지 죽을 만들기 위해 황태채, 당근, 쌀, 오트밀, 단호박, 브로콜리, 닭가슴살, 오리가슴살, 양배추 등을 장 봐왔다. 강아지 밥 준비는 철저하게 이모의 코칭을 따랐다.


그램수와 칼로리가 표시된 이모네 밤톨이의 식단 일지.


이모가 ‘황태자’라 부르는 이모네 강아지는 처음 입양했을 때부터 입이 짧아서 이모가 지극정성으로 밥을 차려 먹였다. 그냥 식구들 먹을 때 같이 해서 먹이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매일 칼로리를 계산해서 계량을 하고 한 끼도 같은 메뉴가 겹치지 않게 식사 준비를 해오셨다는 것을 이번에 코칭을 받으며 알게 되었다.    

황태채를 물에 담가 염분을 빼고, 슈렉이는 칼륨 수치가 높아지면 안 되니 당근, 브로콜리, 고구마, 양배추 모두 한 시간씩 물에 담갔다가 살짝 데쳐서 재료를 준비했다. 이것들을 흰쌀과 함께 끓이다가 오트밀과 단호박을 넣고 완성했다. 슈렉이가 이걸 잘 먹을까?


우아하게 먹으면 좋겠는데 숨을 안쉬고 흡입해서 엄마가 조금 창피하다 슈렉아.

결과는 대 성공!


나는 부엌일을 하지 않을, 살림으로부터 자유로운 팔자를 타고난 여자인 줄 알았는데 강아지 아들 때문에 이렇게 요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강아지 식단. 내가 먹어도 정말 맛있는 죽들




슈렉이는 월요일에 만나요



https://youtu.be/KRMx2SRdWq8

이모가 밤톨이 식사 준비하는 과정 / 유튜브 밤톨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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