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발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되는 자유

by 홍환

내가 출퇴근 때마다 타고 다니는 광역버스는 좌석을 배치할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통로가 아주 좁게 설계되어 있다. 덩치가 좀 큰 사람이라면 혼자서 지나가는 게 버거울 수도 있을 만큼 좁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그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승객을 가끔 발견할 때가 있다. 네발로 기어서 내 좌석 옆을 스쳐 지나간 승객은 조금 뒤에 다시 돌아오는데 방향을 돌리는 게 아니라 후진을 하면서 엉금엉금 돌아온다.


이렇게 좁은 광역 버스 통로를 기어 다니며 전진 후진을 반복하는 사람은 대부분 블루투스 이어폰을 떨어트린 분들이다. 애초에 작고 가볍게 설계된 유닛이 좌석 밑으로 떨어지면 정말 속수무책이다. 앞뒤 자리 간격 역시 좁기 때문에 앉은 채로는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아서 다른 승객에게 주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통로로 나가서 네발로 기어 다니며 바닥 밑을 살펴보는 것만이 유닛을 되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냥 이어폰 하나 버린 셈 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어폰이 너무 비싸다. 떨어트린 분들이 괜히 기는 자세로 전진 후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나도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물리적인 선으로 연결되지 않은 그 가볍고 자유로운 감각을 한번 체험하고 났더니 두 번 다시 유선 이어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옷을 입고 벗거나 자세를 바꿀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그 불편함을 이제 감수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블루투스 이어폰의 자유로움을 즐기며 살아오던 어느 날. 2022년 현재 기준으로 현역 기기임에도 불구하고 블루투스를 지원하지 않는 휴대용 게임기로(닌텐도 스위치 구형)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 출시 되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 게임을 즐기려면 어쩔 수 없이 유선 이어폰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팔다리에 족쇄를 채우는 침통한 마음으로 유선 이어폰을 다시 꺼내서 착용하였다.


하지만 막상 유선 이어폰을 다시 사용해보니 예상했던 느낌과 많이 달랐다. 자유로움을 잃는 답답함이 아니라 견고하고 확실하게 연결된 안정감이 느껴졌다. 유선 이어폰을 처음 사용해 보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충전을 하지 않아도 계속 무한 작동한다는 그 사실이 놀라웠다. 물리적인 선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페어링이 잘 못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닥에 떨어트렸을 때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네발로 기어 다니게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정말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압도적인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오래간만에 유선 이어폰을 사용해보니 이건 미래에 반드시 다시 유행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유선 이어폰을 경험하지 못하고 자라난 세대에게는 이 유선으로 연결된 견고하고 안정된 느낌이 분명 새롭고 흥미로운 감각으로 느껴질 것이다. 블루투스 이어폰의 물질적 가치에 종속되어 좁은 버스 통로를 네발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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