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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Oct 22. 2022

퇴사만 7번째  

나만의 물레를 찾아서


세상 모든 물레를 다 태워버려도 결국 물레에 찔려 잠드는 마법. 그 지독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나는 수많은 회사에 손가락이 찔리고, 또 찔렸는데 왜 또 새로운 회사를 찾아내려는 걸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이 기나긴 이야기를 간결하게 적어본다. 예전에는 인내심 없는 내 잘못이랄까 봐 만나는 사람마다 호들갑 떨면서 구구절절 설명하기 바빴다. 내 퇴사에 정당성을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랬구나, 그럼 그만두는 게 맞겠다’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설명해도 잘 모를 내 회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니 이제야 혼자서도 좀 정리가 된다. ‘모두 각자의 방법대로 회사에 다닐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니… 그런 일들이 있었겠지. 그러니 나도 그랬겠지’


나조차도 달갑지 않지만, 그때의 내 마음을, 내 선택을 이해하기로 했다.

‘만약에 두 번째 회사에 계속 다녔다면 출퇴근은 편했겠다.’, ‘세 번째 회사에 계속 다녔다면, 인센티브는 많았겠지.’ 하며 만약의 게임은 계속되지만 말이다.


[첫 번째 회사 : 2007년/여행사/대기업/인턴]


전문대 관광학과 2학년, 인턴은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했던 실습 과목이었다. 당시 조교 선생님께 끈질기게 부탁해 대형 여행사 본사에서 근무했다.

갑과 을이 동의한 기간, 차비만 받고 일했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비자발적 퇴사였다. 극성수기인 여름방학에 근무했는데 야근과 주말 출근(박람회)을 겪으며 여행사에 대한 꿈을 접었다. 매번 여행 가이드가 되겠다고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줄줄 외웠는데, 인턴 후에는 여행사에는 안 가겠다고 줄줄 읊고 다녔다.



[두 번째 회사 : 2009년~2010년/출판사/대기업/사원]


전문대 졸업 일 년 뒤, 정규직으로 입사한 첫 직장은 출판사였다. 집도 가까웠고 책에 관심이 많던 내게 걸맞은 직장이라고 생각했다.

영업 관리였던 나는 출고, 반품, 매출관리, 장부 대조, 세금계산서 발행 등을 맡았는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반복된 업무와 야근이 지겨웠다. 하염없이 엔터만 눌러 입력했던 출고와 반품 작업이 신물 났다. 야근까지 해서 잘해야 중간인 관리 업무에 출판사의 장점은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오래된 업계 경력만큼이나 이 회사가 첫 직장인 장기 근속자가 많았는데, 그들은 우리 회사 같은 곳이 없다고 늘 칭찬 일색이었다. 한 회사밖에 안 다녔으면서 우리 회사가 제일인지 어떻게 알지? 나는 그들은 모르는 회사 밖 세상이 궁금했다. 방어적인 업무보다 공격적인 업무를 해보고 싶었다. 기획도 하고, 회의도 하고, 내가 참여한 결과물이 있는 업무가 해보고 싶었다.



[세 번째 회사 : 2010년~2012년/무역업/대기업/사원 III]


이름만 들어도 다 알만한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어디 가서 제대로 자랑도 못 해봤다. 내가 가졌던 대기업 타이틀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거짓말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 직장을 알려주면 나를 오해할 게 틀림없었다. 명문대를 졸업해 높은 연봉을 받는 엘리트라고…

사실 나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입사한 사원 III인데 말이다. 내가 반쪽짜리 대기업 직원인 것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껄끄러웠고, 안 하자니 나중에라도 알까 초조했다. 내 자랑이었으나 자랑할 수 없었던 용의 지느러미는 그만 버리고 싶었다.

대기업 고졸 신화는 어떻게 탄생한 걸까? 신화 속 인물을 따라가기엔 나는 너무 평범하고 나약했다.



[네 번째 회사 : 2016년/무역업/외국계 한국지사/사원]


4년제 대학 졸업 후, 일 년의 공백을 거치고 입사한 외국계 한국지사. 본사는 해외에 위치했고 국내에 전자부품을 유통하는 지사로 PM(Product Manager)으로 근무했다. 업무 이외에 잡일이 없어 좋았고, 오랜만의 출근에 설레 옷도 머리도 늘 신경 썼다.


면접 때 영어 테스트를 통과하기는 했으나 이토록 영어를 잘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의 도움으로 영어 이메일이나 리포트는 어찌어찌했는데, 전화영어와 거래처 미팅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역량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만뒀지만, 영어가 아니더라도 만만치는 않았을 회사였다.



[다섯 번째 회사 : 2018년~2019년/정보통신업/중소기업/사원]


취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 공부한 정보처리기사 덕분에 관련 회사에 이력서 내기가 수월했다. 당시 20명 남짓 되는 회사에서 고졸 신화를 이뤄낸 이사와 같이 일했는데, 도무지 매끄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유관부서 직원이 1년 사이에 8번이나 바뀌면서 그 공백이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연극의 멀티맨처럼 내 업무, 네 업무 없이 일인다역을 당연스레 해야 했다. 자조적 농담으로 직원들끼리 서로를 ‘잡부’라고 불렀는데, 그때 김 잡부는 매출 관리, 상품 포장 및 출고, 구매 발주, 원자재 승인서 작성, 영어 번역 등의 넓은 업무 스펙트럼을 가졌다. 중소기업 정부지원금을 다 받을 때까지 1년을 악착까지 버티다 지친 잡부는 떠났다.



[여섯 번째 회사 : 2019년~2021년/정보통신업/중견기업/대리]


처음 직위를 가졌던 회사였다. OO 씨가 아니라 드디어 김 대리님이라고 불렸고, 그 호칭만으로 스스로가 대견했다. 입찰, 제안서 작성, 매출/매입관리, 정부 과제 관리를 맡았고, 사수였던 부장이 퇴사하고, 본부장과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


적응을 잘하는 편이라 생각했으나 당최 적응이 잘 안 됐다. 같은 팀 입사 6년 차 과장님께 매일같이 물어봤다 “과장님은 적응이 좀 됐어요?” “아니, 난 아직도 적응 중이야!” 고인 물이라 생각한 사람들도 몇 년째 적응 중이었다. 나중에는 스트레스로 배 안에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위경련과 과호흡이었다. 그야말로 온몸이 비비 꼬이던 차에 다섯 번째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에게 이직 제의를 받으며 김 대리는 퇴사했다.



[일곱 번째 : 2021년~2022년/의료 플랫폼/스타트업/파트장]


전 회사 동료의 추천으로 경험도 없던 스타트업 이커머스 파트에 입사했다. 수평적 조직으로 OO님 호칭을 사용해서 내 이름 뒤에 소중한 ‘대리’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회사에 다녀본 적 없는 사람들과 로켓 발사 같은 추진력으로 끊임없는 성장과 결과물을 증명해야 했다. 나는 정시 출퇴근이 중요한 사람인데 8시간 이상 근무해도 퇴근할 때 눈치가 많이 보였다.


업무 방법과 범위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고, 달리고 달려도 채찍질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어디로 달리는지도 모르고 달려야 하는 분위기에서 팀장은 퇴사했고, 나는 해가 바뀌어 파트장이 됐지만, 여전히 방향성에 의심이 들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었는데, 출근에 대한 무게는 나를 고민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이 정도 회사에 다녔으면,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회사에 꾸준히 다닐 수 있도록 학습효과가 생겨야 하는데 나한테는 이상한 방향으로 학습효과가 나타났다.

이제 퇴사가 무섭지만은 않다. 여러 번 물레 바늘에 찔려서 더 이상 바늘이 무섭지만은 않다. 숨겨진 세상 물레를 다 찾아내 열 손가락을 찔려도 괜찮다. 찔려도 잠들지 않는 나만의 물레를 찾아보고 싶다.


그 학습효과가 내게 알려줬다. ‘몇 번이나 쓰러져있는 나를 깨워 줄 사람, 하기 싫은 일에서 나를 구해줄 왕자님은 언제나 그랬듯 내가 될 거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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