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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Oct 22. 2022

나를 위한 위로

밭을 매지 않을 때도 소는 운다.


지금이야 소가 쟁기질하는 일이 많지 않겠지만, 그 옛날 소는 새벽같이 일어나 종일 밭을 매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일하러 나가지 않는 날에 소는 외양간에서 여유롭게 여물을 먹었을까? 밭에 나갈 때면 너무 지쳐있고, 밭에 나가지 않을 때면 내일이 걱정돼 힘들지 않았을까?

들판에 자유로운 들소가 부러우면서도 굴레가 약속한 끼니와 평온함이 그리운 집소야. 나와 참 많이 닮아있구나.


예전 회사에서 성격유형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내 타고난 기질은 모험을 추구하는 데, 후천적으로 발달한 성격은 안정을 추구한다고 했다. 지킬 앤 하이드처럼 상반되는 기질과 성격 때문에 안정적일 때, 평온함을 느끼지 못했고, 모험을 추구하면서도 두려웠다. 가축도 들소도 되지 못한 이 어정쩡한 존재가 입, 퇴사를 반복하면서 맘고생이 많았다.


[2019년 2월 말]


직장을 벗어난 지 5일이 되지 않아 불안감이 나를 가득 채웠다. 출근하듯 집에서 나와 오늘이 퇴사 며칠째인가 손꼽아봤다. 이제 겨우 5일째 아침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루가 이토록 긴 것인가? 회사 안에 있을 때보다 회사 밖의 시간이 더 더디게 흘러갔다. 온 하루를 내 의지대로 채워야 하니 하루가 짧지 않았다.

좁은 사무실 안에 틀어박혀 얼마 안 되는 돈을 버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가? 다시 취업할 때까지 고작 몇 달 동안 돈을 못 벌면 어떤가 했는데 그마저도 못하니 이리도 초조했다. 빚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아둔 돈도 있어 당분간은 걱정 없는데 다시 일할 기회마저도 없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뭐가 잘못인 걸까?’ 계속 앞으로 나아간 것 같았는데 결국 제자리걸음인 내 생각이 시계추처럼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했다. 이런 불확실함 속에서 기회는 존재하는 걸까? 인생이 원래 파란만장하다고들 하지만 나름 보수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 내가 이리도 다이내믹한 직장 생활을 할 줄 몰랐다. 이직하고 그만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2019년 5월 초]


대체 공휴일인 오늘은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날 같다. 모두가 쉬는 날이니 나도 왠지 눈치 안 보고 쉬어도 될 것만 같다. 그런데 벌써 3개월째 쉬고 있는 내가 공휴일을 누릴 자격이 있나?


내 퇴사 소식을 알고 있는 친구에게 카톡을 받았다. “하여튼 그건 그렇고 별일 없었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취직은 했는지 돌려 물어본 건가 싶어 신경 쓰였다.

별일이 있다. 사는 게 별일이다. 별일 없는 매일이 이제 내겐 별일이 되었다. 별일이다. 텅텅 빈 하루를 이리저리 채워보는 것은, 늘어져 있는 몸과 마음을 어떻게든 추스르는 것은.


어린아이가 넘어지면 누구든 달려와 일으켜주고, 위로해주지만, 어른은 스스로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걸어 나가야 한다. 내가 넘어진 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나조차 내가 위로받아도 되나 싶어 우울한 날.

얼마 전 백상 예술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김혜자 씨의 수상소감이 와닿았다. <눈이 부시게> 드라마 엔딩 장면의 대사라고 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없지만, 김혜자 씨의 목소리가 더해진 이 말이 눈물 나도록 따뜻했다.


‘내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것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에서>


모두를 위한 공휴일, 모두를 위한 위로.

어쩐지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망설여지는 누리고 싶은 것들.

아무도 괜찮다 말해주지 않지만, 오늘 같은 공휴일은 편히 누워 걱정 없이 이 위로의 말을 꼭 껴안고 싶다.

꽉 껴안아서 나를 위한 이 위로가 내 안에 가득 들어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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