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268.66km, 오늘: 12.38km, 걸음 수: 15,643
표지사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혹시? 구룡마을 아세요?
김 차장이 점심을 먹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구룡마을? 그럼~ 당연히 알지. 내가 그래도 일원동에서 꽤나 살았었는데, 구룡마을을 모를까?”
나는 입 속의 음식물을 흘릴까 조바심을 내면서도, 아주 잘 아는 동네라고 뱅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장님은 이미 가 보셨겠네요? 구룡마을이 곧 없어진데요. 혹시라도 안 가보셨으면 가보시라고요.”
김 차장이 뉴스 기사에서 봤다며, 서울에서 오래된 마을을 찾아다니는 내게 구룡마을을 추천했다.
나는 순간 머리가 멍멍해졌다. 그리고 먹던 음식물을 마저 삼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구룡마을이 아직도 건재하다구?’
사실 나는 구룡마을에 가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구룡마을은, 그저 내가 살던 일원동 대청마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옆 동네였을 뿐이었다. 국민학교 친구 몇이 살기는 했지만, 우리 집과는 꽤 떨어져 있어 굳이 그곳까지 놀러 갈 일은 없었다.
80년대 초, 대청마을은 대대적인 재개발로 이름만 남은 마을이 되었지만, 구룡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 이주민들의 불법 비닐하우스로 더욱 유명해지고 있었다. 한겨울이면 연탄불로 집이 전소되거나, 폭우에 이재민이 쉽게 생기는 동네로 뉴스에 종종 등장하곤 했다.
그렇게 내가 살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잘 아는 동네였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구룡마을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벌써 4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한 번 가봐야겠는데?
나는 밥을 먹다 말고 김 차장에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김 차장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잊었던 구룡마을을 40년 만에 찾는다니, 기분이 묘했다. 그때 그 친구들은 아직도 거기에 살고 있을까?
구룡마을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한복판에 남아 있던 마지막 판자촌이다. 1980년대 개포지구 개발과 함께 철거민들이 몰려들며 형성되었고,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로 시작해 수백 가구가 모여 살았다. 재난과 화재, 도시 빈곤의 상징이었던 이곳은 30여 년간 개발 갈등 끝에 2020년대 들어 본격적인 철거와 공공주택단지 개발이 추진되었다. 서울 한복판에 공존했던 ‘가난의 얼굴’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한낮의 온도는 30도를 넘고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는 6월이면 한여름이다. 태양빛이 뜨거웠지만, 오랫동안 걷기 위해 얼굴에 선크림을 잔뜩 발랐다. 챙이 넓은 모자는 벌써 두 번이나 잃어버려서, 겨울에 주로 쓰던 두껍고 낡은 벙거지 모자를 썼다. 우선 마포 집에서 개포동 구룡마을까지는 버스를 이용했다. 한 시간 이십 분이나 걸리는, 제법 먼 거리였다.
나는 짧은 거리를 가든, 먼 거리를 이동하든 주로 버스를 애용한다. 오랜 시간을 버스 의자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즐긴다. 물론 한참을 걸어야 하는 날에는 그만큼 시간을 빼앗기지만, 버스는 걷기만큼이나 감상을 쌓고 풀어가기에 좋은 수단이다.
이태원을 지나 반포대교를 건너고, 서초동을 거쳐 역삼동과 대치동을 지나 드디어 개포 주공 1단지 앞에서 내렸다. 내가 기억하던 5층짜리 주공아파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그 자리는 고층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이름도 하나같이 외우기 어렵고 낯선,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 ‘레미안블레스티지’ 같은 아파트들이 구룡마을 건너편에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성’을 쌓아 올렸다.
지하도로 공사가 한창인 양재대로를 건너 구룡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입구에는 재개발을 앞둔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주민들의 현수막이 가득 걸려 있었다.
마을은 한산했다. 간간히 주차된 차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움직이기는 하나?’ 싶었다.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바짝 마른 시멘트 길을 걸을 때마다, 바사삭 거리는 모래 밟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숲은 먼지에 희끗했고, 그 옆으로는 낡은 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집 주변에 버려진 가재도구들은 오래된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화석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이미 주민들은 다 떠나가고 없었다. 나는 마치 출입금지구역에 들어온 것 마냥, 집들을 살피며 걸었다.
구룡마을 풍경은 일전에 다녀온 중계동의 백사마을과 매우 흡사했다. 집집마다 담벼락은 이미 낡을 대로 낡아 부식이 심했고, 한때는 굳센 장성이었는지 마지막 자존심으로 겨우 땅 위에 버티고 있었다. 그 위로 흰색 배추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데, 마치 다 죽어가는 마을을 심폐소생하듯 살랑대며 맴돌고 있었다.
마을길은 이내 구룡산 숲길로 이어졌다. ‘동네가 이렇게 작은 건가?’ 싶을 정도로, 마을 입구에서 금세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저기 밭이 보인다. 밭에는 고추도 심어져 있고, 낮게 깔린 저 것은 상추 같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걸으니, 오랜만에 사람이 보였다. 밭에 심어둔 농작물에 물을 대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거주민인지, 아니면 외지에서 온 분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옥수수의 키를 보니 꽤나 정성껏 가꾼 듯했다.
점점 더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 듯해 다시 되돌아 나왔다. 아까 지나쳤던 길을 벗어나 다른 쪽으로 걷자, 비로소 여러 채의 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여기가 진짜 구룡마을인가 보다’
여전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부서진 집들 사이로 골목길은 서로 엉키고 섞였다. 그곳은 이곳이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서진 잔해와 수풀로 가득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의 슬레이트 지붕 위로, 묘하게도 개포동의 웅장한 아파트가 비교되어 보였다. 그 광경은 부와 가난, 새로움과 낡음, 탄생과 사라짐이라는 상반된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사진을 찰칵 찍었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나의 예술작품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아직 남아있는 동네 친구들은 없었다. 이전의 중계동 백사마을에서는 애꾸눈 누렁개도 만나고 그랬었는데, 이곳에는 고양이 한 마리도 보질 못했다. 그나마 숲 속에서 가깝다고, 새소리가 좋았다.
왠지 이 정도면 걸을 수 있겠다 싶은 골목길이 보였다. 그리로 들어섰다. 골목은 매우 좁았다. 저 앞의 집은 대문이 열려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열어둔 듯해 집 안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사용 중인 세간살이가 보였다. ‘여긴 아직 사람이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도 죄스러워졌다. 얼른 눈을 앞에 두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파란 창공 위로 낡은 교회 십자가가 드높다. 걷는 내내 여러 개의 십자가를 보며, ‘이 작은 동네에 교회가 참 많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중앙에 교회가 하나만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나 어렸을 때, 일원동 대청마을에는 ‘대청교회’라는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었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서 나누어주던 사탕과 빵을 먹으려고, 평소 교회에 다니지 않던 동네 친구들까지 전부 모였던 기억이 난다. 아련하다. 또 남의 동네에 와서 나의 동네를 추억한다.
이제 구룡마을 전체를 다 돌았나 보다. 저 앞으로 아까 들어왔던 마을 입구가 보였다.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햇살에 널은 빨래가 여기저기 보였다. 그 옆으로 고추나무가 반질반질하다. 저녁에는 고추를 따서 된장에 발라 먹으면, 누가 뭐래도 최고의 밥상이다.
다시 입구로 나왔다. 뒤돌아봤다. 언제 다시 오려나 싶었다. 아니,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반백년을 살아온 구룡마을을 이제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입구 맞은편에 철거를 위한 장소가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아까 보았던 마을 입구 현수막은 더 잘 보인다. 누구를 위한 주장인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씁쓸하다. 이제 나는 구룡을 떠나 미래의 도시 개포로 건너간다. 벌써부터 쨍한 햇빛에 목이 탄다.
- 제2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