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하지 않아도 괜찮아

by 슈퍼엄마

나는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다. 매달 다이어리에 그달의 목표를 큼직하게 쓰고, 매주 일요일 밤이면 다음 주의 일정을 계획한다. 하루 단위로도 해야 할 일을 todo 리스트로 만들어 정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걸 지키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어쨌든 계획은 있어야 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사실 나만큼 즉흥적인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면 바로 움직이는 성향.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달라졌다. 특히 교사라는 직업은 매 시간 수업 진도를 나가야 하고, 학사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예측 가능한 스케줄이 점점 편해졌고 짜인 일정에 맞추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계획형 인간이 되어있었다.


휴직 중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출근하지 않아도, 마감이 없어도 나는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있다.
7시 30분 기상, 아이들 아침 준비와 등교

→ 월수금 9시 수영, 화목 10시 요가

→ 12시 30분까지 휴식 및 점심식사
→ 1시 도서관 출발- 2시간 독서나 글쓰기
→ 3시 30분 아이들 하교
→ 저녁과 집안일 (저녁엔 강의를 듣거나 모임이 있는 날도 있다. )
이렇게 하루를 꽉 채워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그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이들을 학교 앞에 내려다 주고 수영장에 가려는데, 갑자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귀찮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영화나 한 편 볼까?"

영화관에 혼자 간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최근에 본 영화는 '사랑의 하츄핑'이다. 아이들과 함께 보는 영화 말고 내가 선택한 영화를 보고 싶었다. 몇 년 전에 바둑기사 조훈현의 <고수의 생각법>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마침 조훈현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해서 보고 싶던 차였다. 바로 검색해 보니 조조 영화 첫 타임이 10시 50분으로 아직 시간이 남았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도서관에 들렀다.


김신지 작가의 ‘제철행복’이라는 책을 꺼냈다. 책은 말했다. 우리가 제철 음식을 먹듯, 각 시기마다 누릴 수 있는 ‘제철의 행복’이 있다고. 그 문장을 읽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이 휴직의 시간도 이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제철행복일지 모른다고.


창가에 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한 시간쯤을 보냈다. 조조 영화 시간이 되어, 먹고 싶은 간식도 챙겨 영화관에 들어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있던 재료로 소박하지만 따뜻한 점심을 차려 먹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려다 펼쳤는데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조금 졸았다.

무언가 거창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성과를 낸 것도 아니지만, 그 하루는 충분히 좋았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움직였고, 예상하지 않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기쁨만 충만함이 따라온 하루였다.

계획에 따라 사는 삶도 좋지만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지내는 하루도 충분히 좋다. 아니,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계획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있다.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어쩌면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제철의 행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끔은, 아무런 계획 없이 흘러가는 하루를 조금은 여유롭게, 기꺼이 누려야겠다.



이 연재는, 휴직 중 나를 돌보는 다양한 방식들을 기록하는 에세이입니다.

일과 육아, 성장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선 내가 어떻게 나를 다시 바라보고 회복해 가는지를 나누려 합니다.

쉼의 시간 속에서 마주한 나의 이야기들이 누군가의 마음도 함께 다독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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