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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Apr 09. 2024

포켓커피 2. (잊을 권리)

<결말은 자유>

누군가에겐 너무 당연한 하루가 다른 누군가에겐 죽을힘을 다해 애를 써야만 겨우 가능한 순간이다.

누군가에겐 너무 평범해서 지루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겐 꼭 한번 누려보고 싶은 간절한 삶이다.


하루와 일상은 구체적인 반면, 순간과 삶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시간과 공간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건 마치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사랑의 행위는 구체적이나 사랑의 언어는 추상적이다. 나는 이런 추상적인 언행이 싫다. 그건 내 성장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추상적으로 말하는 순간, 빛의 속도로 날아왔던 물리적 통증. 그건 추상의 시공간을 단번에 구체의 시공간으로 만들었다.



경은에게 모바일 청첩장을 보낸 건 이제 그만 구체의 세상으로 돌아오라는 내 나름의 배려였다. 여전히 존재하지도 않은 세상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정작 상처받은 사람은 난데, 혼자서 모든 상처를 껴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잘 다니던 직장을 휴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사람이 안쓰럽다 못해 불쌍했다. 그렇게도 잘 헤어지고 잘 만나던 사람이 이번엔 왜 훌훌 털어내지 못하는지. 왜 모든 걸 껴안고 살아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좀 더 잘 챙겼어야 했어요. 내가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내가 좀 더...."

"그만 좀 해요. 남겨진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떠난 사람이 잘못이지. 죄책감만 잔뜩 남겨놓고 결국 자신은 편안할 거 아니에요."

경은의 얼굴에 비친 당혹감을 볼 수 있었지만, 난 내 감정을 애써 꾸미고 싶지 않았다. 이건 진심이었다.




은정이에게 첫눈에 반한 건 사실이었다. 누구나 첫눈에 반할 만한 외모였다. 귀여운 얼굴에 적당히 글래머러스한 몸매. 웃을 때 한쪽에 보조개가 들어가는 모습까지. 아마도 그녀를 본 남자라면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남자들과 내가 다른 게 있다면, 남들은 한번 더 쳐다보는 것으로 끝났고, 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은정이는 예상 밖의 아이였다. 자신이 얼마나 귀엽고 아름다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것도 역시 그녀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겠지....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연민을 느꼈다. 연민과 사랑은 같은 모체에서 퍼진 씨앗과 같다. 단지 씨앗이 내려앉아 뿌리를 내린 토양이 다를 뿐이다.


은정의 일관적이지 않은 성격에 지칠 때마다 나는 경은을 찾았다. 그녀는 은정과 절친한 사이였다. 어렸을 적부터 친했다고 하니, 거의 자매나 다름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사실 외모는 은정이가 더 훌륭했지만, 성격은 경은과 더 잘 맞았다. 육체적 사랑은 은정과 했지만, 정신적 교감은 경은과 했다고나 할까. 난 이런 관계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켜야 할 선만 잘 지키면 되는 거였다.

내가 은정이 한 사람을 7년 동안 만나는 동안, 경은은 다섯 명의 남자와 만났다 헤어졌다. 그 또한 경은의 능력이었으리라.



은정이는 자주 나에게 사랑을 갈구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사랑을 갈구했다. 난 그걸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에게 사랑은 추상이었고, 그걸 눈에 보이도록 만드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말, 행동, 하다못해 선물이라도."라고 은정이는 말했지만 나는 그런 것이 도대체 어떻게 사랑을 대변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랑은 추상적인 영역에 온전히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 구체적인 세상으로 넘어오는 순간 물리적인 아픔으로 변할 게 뻔했다. 그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내 아버지를 보면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럼 결혼이라도 해줘. 그 약속 비슷한 거라도."


그녀와 결혼을 안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을 언급할수록 결혼의 우선순위는 점점 더 뒤로 밀려났다.



은정이 나와 헤어진 후 3달 동안 연락이 없었다. 나는 안도와 허전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안도와 뭔가 내 삶에 꼭 있어야 할 나사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었다. 그 두 가지 감정이 서서히 사라질 때쯤 은정은 다시 나타나 나에게 포켓커피를 내밀었다.


"오빠가 이걸 먹고 사랑에 대해 느끼길 바래."

"초콜릿을 먹고 어떻게 사랑을 느껴?"

"난 느꼈어. 달콤함 뒤에 따라오는 쓴 맛을. 사실은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고 직접 마셔야 그걸 느낄 수 있는데 오빠는 그것도 싫어하니까."

"또 그런 식으로 말하네. 왜 다시 나타난 거야?"

"오빤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응."

"오빤 이제 정말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먼저 떠난 건 너잖아. 왜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해?"

"날 떠나게 만든 건 오빠잖아."

"또 내 잘못인 거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내 20대가 모두 오빠에게 묻혔는데, 그럼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난 30대 초반까지 묻혔어."


내 말에 은정의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완전히 나간 건 그 후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자기야, 냉장에고 이거 뭐야?"

"응? 뭐?"

"이거, 어 포켓커피네? 이거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거 아니야? 이탈리아 여행 가면 한국 사람들이 꼭 사 오는 거 중에 하나라고 어디서 들었는데. 오빠 이탈리아 다녀왔었어?"

"응? 아니야. 친구가 여행 갔다가 사다 준 거야."

"근데 왜 안 먹었어?"

"응, 그냥. 안에 든 커피가 쓸 까봐."

"아, 자기는 커피 안 마시지? 내가 먹어도 돼?"

"응? 으응."

"우리도 이번에 저거 사 오자. 친구들한테 선물로 주면 좋을 것 같아."

"응, 그래."

"청첩장 다 돌렸어?"

"응, 뭐 대충. 줄 사람은 다 줬어."

"근데 자기 집에는 사진이 진짜 없다. 원래 혼자 자취하면 사진도 막 붙여놓고 그러던데. 왜 이렇게 깨끗해?"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렇지 뭐."

"내 사진도 없으니까 그렇지."

"아, 나중에  결혼사진 붙여두면 되지 뭐."

"우리 사진 진짜 잘 나왔지. 그렇지? 역시 청담동에서 하길 잘했다니까."

"그러게. 예지 말 듣길 잘했지."


내 무릎에 앉는 예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오늘 자고 갈래?"

"아니. 일찍 갈 거야."

"다음 달이면 결혼인데...."

"그러니까 일찍 집에 가야지. 나중에 결혼하면 맨날 붙어 살 건데. 뭐 하러 미리 같이 살아."

"뭐야, 나랑 미리 같이 살기 싫다는 거야?"

"에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암튼 오늘은 그만 갈게."

"알겠어."

옷을 챙기며 현관문을 나가는 예지를 따라나섰다.

"나오지 마. 나 혼자 갈 수 있어."

"내가 데려다줘야지."

"에이, 나 혼자 갈 수 있어. 자긴 집에서 쉬어."

"어.... 그래. 그럼 조심히 가."

"응, 집에 가서 연락할게."

"그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은정이와 정반대인 여자를 만났다.

절대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내가 더 매달리게 되는.


마치 이탈리에선 흔하디 흔해서 쳐다보지도 않을 포켓커피를 여기서는 귀하게 여기며 아껴먹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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