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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26. 2024

그녀의 취향 2


그날 밤,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들은 사람은 나 혼자 뿐이라고 했다. 우르르 쾅쾅 울리는 천둥소리와 새찬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들렸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마와 아빠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다섯 명의 연예인들이 몸싸움을 하며 억지웃음을 만들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진짜 그게 웃기다는 듯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엄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천둥소리?”

“아니, 무슨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

“에이, 무슨 소리야. 천둥소리 때문에 착각했나 보네.”

그때 다시 한번 선명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엄마, 이 소리 안 들려?”

엄마와 아빠는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있었다. 30분 후 사이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실로 나가 베란다 문을 열었다. 하지만 빗소리와 사이렌 소리, 사람들의 소리만 들릴 뿐 비와 어둠으로 얼룩진 불빛이 너울거렸다.  

 그 여자가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날부터였다.


그놈은 혼자 사는 여자들의 집을 꽤  뚫고 있었다. 거기가 반지하든, 4층이든 상관없이 여자가 혼자 있는  곳은 귀신같이 냄새를 맡았다.




“저기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카페 점원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저… 불러도 대답이 없으셔서…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만….”

 "아, 네. 감사합니다."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잔잔한 재즈 피아노소리가 흘러나왔다. 묵직한 원목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가리킨 문장엔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차분한 카페 분위기 때문에 단비는 책에 더욱 빠져들었다. 주인공 남자가 토막살인 당한 아이의 발가락을 찾은 장면까지 읽은 후 단비는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기…”

카페 점원이 단비를 불렀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커피가 식었다면 다시 내려 드릴까요?”

점원이 정사각형의 브라우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책 읽다가 그만, 커피가 식어버렸네요.”

“네. 지금 이 시간엔 손님이 별로 없어서요. 한잔 더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책 재밌나요?”

“네. 별로 기대 안 하고 샀는데, 첫 장부터 흥미진진하네요. 이 책 아세요?”

“네. 그 책을 쓴 작가를 제가 좀.... 알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괜히 반가운데요.”

“그 책 다 읽으시면 감상평 부탁드려요. 작가님께 전해드릴게요.”

“아, 네. 그럴게요.”

카페 점원은 식은 커피를 가져가고 뜨거운 커피로 바꿔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리곤 은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커피머신 뒤에 숨어 단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안경 너머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단비는 1/3 정도 읽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 책과 편안한 카페. 이 정도면 휴일을 잘 보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소설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은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작은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정했다. 카페를 나서기 전에 쿠폰을 하나 챙겼다. 열 번 도장을 찍으면 무료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쿠폰이었다. 단비는 그 카페의 분위기와 테이블 위치, 점원의 동작과 커피의 향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다음 오프 때 다시 한번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쓸 생각을 하면 사람들의 말과 행동, 사소한 물건과 미세한 향기까지.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직접 보지 않았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글로 쓰는 것엔 한계가 있었다. 물론 미스터리적인 요소는 직접 경험하기 힘들기 때문에 상상에 의존하는 편이지만.


소설을 잘 쓰는 사람들에겐 역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고 단비는 생각했다. 그게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글로 배운 사랑을 하는 것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랑을 쓰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힘들까? 단비는 그것 또한 판단하기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단비는 네일 리무버를 솜에 묻혀 빨간 매니큐어를 지웠다. 그리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워드를 열어 주인공과 대략적인 내용을 적었다. 소설을 쓰려면 충분한 자료조사와 인물 연구, 전체적인 내용이 포함된 시놉시스가 필요했다. 하지만 단비는 시놉시스를 미리 쓰지 않았다. 그저 매일 노트북을 열고, 생각나는 대로 쓰고 쓰고 또 쓰면서 소설의 마지막까지 걸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글을 고치든, 다시 쓰든 할 수 있었다. 완결을 짓지 못한 소설은 만들다 만 옷에 불과했다. 어떤 디자인이든 다 만들어진 옷은 입을 수나 있지, 만들다 만 옷은 입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첫 문장이 가장 중요했다. 첫 문장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면 책장을 넘기게 만들기도 힘들기 때문이었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산다."

유명한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이런 문장을 써야 하는데....'

단비는 워드에 이 문장을 괜히 써보면서 자신에게도 이 같은 영감이 내려오기를 간절기 기다렸다.  

'그의 말쑥한 옷차림 뒤에는 날카로운 눈빛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야. 이건 너무 노골적인 문장이야. 진한 커피 향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누군가의 채취가 묻어있다.... 이건 좀 변태 같은가? 음.... 좋아. 제목은 '카페 향기' 이 향기에 묻힌 냄새를 그 사람이 눈치채는 거지. 거기엔 누군가의 땀냄새와 피냄새와 발냄새? 아니, 그건 너무 코믹으로 가는 거잖아. 하긴 미스터리코믹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좋아. 일단 그냥 계속 써보는 거야!'


단비는 워드 맨 상단에 '향기 카페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 한 이야기  "카페 향기"'라고 제목을 썼다. 그리고 오늘 들렀던 카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카페의 구조와 느낌은 기억이 나는데 카페에서 일하던 사람의 인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까지 주고받았는데 기억나는 건 고작 검정 뿔테 안경이라니....  다음 주에 다시 들러서 그 사람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해야겠다고 단비는 생각했다.



진한 커피 향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누군가의 채취가 묻어있다.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어쩌다 한 명쯤 있게 마련이다. 그날 이 카페에 들른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카페 사장 우식은 그날따라 더 진하게 커피를  내렸다. 평소엔 우유에 희석된 라테 향이 강했지만, 그날은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진동했다. 그 이유는 전날밤 그가 벌인 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락스를 이용해 깨끗이 닦아냈지만, 여전히 그의 손에서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커피가 좀..... 이상합니다. 커피에서 락스 냄새랑 피 냄새가 나요. 이거 왜 그렇죠?"

그 손남이 말했을 때 우식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

"그, 글쎄요.... 제가 어제 카페 청소를 좀 열심히  하긴 했거든요. 청소하다가 손가락을 살짝 다쳤었는데... 그 냄새가 나는 모양입니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보통 제가 냄새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당황하던데.... 그게 뭔 소리냐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사장님은  제 말을 믿으시는 건가요?"

순간 우식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 그, 그런가요? 손님이 워낙 선하게  생기셔서... 하하하. 커피 향이 싫으시면 다시 드리겠습니다."


"단비야~ 밥 먹자~"

저녁 준비가 다 되었는지 주방에서 엄마가  단비를 불렀다.

"에이. 얼마 못 썼는데. 여기서  멈추면 또다시 쓰기 힘든데.... 어쩌지?"

"야, 백단비. 빨리 밥 먹어. 그리고  이번달 생활비 안 들어왔다."

"아이고, 알았어요. 내가  올해는 꼭  독립을  하고야  말겠어."

"어디 한번 독립해봐. 밥이나 먹고살 수 있겠어?"

"병원 근처로 구하면 되지."

"거기 월세가 얼마나 비싼데 그래. 청약이나 잘 넣어서 중에 청년주택 당첨되면 그냥 집을 사."

"내가 그럴 돈이 어딨 어?"

"그러니까 잘  모으란 말이야. 또 소설 쓴다고 병원 그만두고 그러지 말고."

"에이, 진짜 엄마!"

"어, 알았어. 밥 먹어. 내일 새벽에 나가야 한다며."


단비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 휘리릭 입에 넣었다.

올해는 꼭 독립을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아까 읽었던 책의 일부분이 떠올라 선뜻 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보다 더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간호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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