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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16. 2024

내 손을 잡아 줘. 2

[단편소설] 결말은 자유

선명한 하늘색 물감이 물속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듯한 장면이 눈에 아른거렸다.

경애는 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며 말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여기 앉으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일하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네? 절 아세요?"

"네. 00 병원, 분만실 선생님.... 맞으시죠?"

"아.... 네...."


경애는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일단 앉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할게요."

경애는 빈좌석에 앉으며 그를 어디서 만났는지 헤아려보았다. 하지만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금, 절 어디서 봤었는지 생각 중이신 것 같은데...."

경애는 자신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닌데 말이에요."

"뭐 병원에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그래도 좀 서운한대요. 기억 못 하시다니."

경애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 우리가 어디서 뵜었나요?"

"흠.... 기억을 잘해보세요."

그때 남자가 한 손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진한 쌍꺼풀 때문에 선한 인상을 풍기는 그의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아! 갑자기 퍼뜩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아.... 네.... 임상병리실.... 아,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마스크를 안 쓰고 계셔서 몰라봤습니다."

"네, 제가 마스크 쓰고 안 쓰고 가 너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뭐, 가린 게 더 낫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경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떠올랐던 장면의 잔상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이번엔 잘못 본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손가락 약지에 커플링이 껴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제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어요. 그래서 산부인과에 들렀었거든요. 그때 선생님을 뵜었습니다. 아직 분만하려면 몇 달 남았지만, 미리 병동 예약해 두었거든요."

"아 네."

"아, 결혼식은 아직 안 했어요. 아기 낳고 하기로 했거든요. 갑자기 생긴 아이라서.... 서로 바쁘기도 하고요. 저도 올해 휴가를 다 써버려서...."

"네...."

경애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이번엔 정말 자신이 잘못 본 거라 확신했다. 아이를 낳고 곧 결혼할 남자 옆에 자신이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 다음애 내려요. 병원에서 뵐게요."

"네, 선생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또 뵐게요."


경애는 버스가 멈추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내렸다. 버스는 이내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경애는 떠나가는 버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명하게 떠올랐던 장면이 떠나가는 버스와 함께 아스라이 흩어졌다. 경애는 쓴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애가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건 6개월이 지난 후였다.

데이 근무를 위해 출근한 경애는 다른 날보다 더 피곤해 보이는 단비의 얼굴을 보았다.  나이트 근무가 힘들긴 하지만, 단비의 얼굴이 그날따라 더욱 창백해 보였다. 경애는 그 이유를 인수인계받으며 알 수 있었다.


분만 예정일을 한 달 앞둔 산모의 양수가 갑자기 터져 분만실로 내원했다. 초산모였지만 진행이 잘 되어 아기를 자연분만했지만, 출혈이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자궁이완증이 온 것이었다. 자궁 수축을 위한 약을 투여하고, 급하게 수혈도 했지만,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종합병원이었지만 산부인과 전공의는 김 선생님 한 명뿐이다. 그것도 산과 환자는 몇 명 되지 않아 대부분 부인과 진료를 본다. 급할 때는 교수님이 당직을 서주기도 하지만, 평간호사가 늦은 밤에 교수님을 호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산부인과는 의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과가 된 지 오래였다. 그나마 경애의 병원엔 아직 전공의가 한 명이라도 있어서 산부인과를 유지하고 있지만, 다른 병원의 경우엔 이마저도 없어서 아예 산부인과 병동을 없애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인력도 부족하거니와 응급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경험이 풍부한 의료진도 부족한 현실이다. 어느 한 가지를 문제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는 다른 문제를 낳고, 그 문제들의 결과는 고스란히 환자에게로 응축되어 나타났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누구에겐 매우 평범한 일일 테지만, 누구에겐 목숨을 건 이벤트가 된다. 만 번에 한 번 일어나는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다들 나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살지만, 생과 사 앞에서 그런 확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수술 도중 산모의 심장이 멈추었다고 했다. 심폐소생술을 하며 애를 썼지만, 그녀의 혈관으로 들어가 굳어버린 양수는 산모의 폐와 심장을 멈추게 만들었다. 수술실 앞에는 행복에 넘쳐야 할 가족들이 오열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남자는 근무를 하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하얀색 가운을 걸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서로 너무 바쁘니 나중에 아기를 낳고, 몸이 회복되면 결혼식을 하자고 약속했었는데,

지금은 여행 갈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더 좋은 곳으로 여행 가자고 했었는데,

분만예정일까지 아직 한 달 정도 시간이 있으니 나중에 함께 아기 용품을 더 사러 가자고 했었는데.....


'나중'은 절대 오지 않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임상병리사인 그는 아내의 사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해의 영역은 내 일이 아닐 때만 가능한 것이었다. 흘러야 할 곳에서 흐르지 못하는 눈물은 그의 온몸으로 흩어졌다. 그는 그대로 서서 온몸으로 퍼진 눈물을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이진아 / 박재민  (여아/9월 13일. 6 am 15분)


경애는 데이 근무가 끝난 후 신생아실로 갔다. 동기 간호사인 효진에게 인사를 하고, 아기를 보러 들어갔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는 신생아의 가느다란 발목에 핑크색 밴드가 둘려 있었다. 축복받아야 할 아기의 생일이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그날, 경애는 아기의 작은 두 손을 오래도록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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