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량 Mar 05. 2024

무지개

단편소설 [결말은 자유]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는 찬이 뒤로 어두운 보랏빛이 일렁거렸다. 그건 부처나 예수의 머리 뒤로 비치는 후광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치 해변으로 밀려왔다 달려 나가는 파도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빛이었다. 무지개가 분명히 보이지만 손에는 잡히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지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빛이었다.

항상 몽글몽글 피어오르듯 일렁이던 찬이의 빛이 오늘따라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야, 김찬!"

내가 부르는 소리에 찬이가 돌아보았다.

"잘 자라. 내일 학교에서 보자."

"뭐야, 싱겁긴. 낼 보자."

찬이는 다시 발길을 돌려 터벅터벅 걸었다. 뾰족하던 녀석의 빛이 약간 뭉툭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렇게 어둡고 날카라운 빛은 오랜만에 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누나였다.

"응, 왜?"

"어디냐?"

"지금 가고 있어."

"그럼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좀 사와라. 애들이 먹고 싶대."

"알겠어. 돈 주는 거지?"

"어이구, 삼촌이 좀 사주면 안 되냐?"

"응, 안돼. 학생이 돈이 어디 있어?"

"알았다. 아참, 이번 주말에 애들 좀 봐줘."

"주말에 왜?"

"응, 매형이랑 둘이 영화 보러 가려고.

"아, 누나 나 고2야. 나 공부해야 된다고."

"야, 주말 하루 공부 안 한다고 인생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뭐. 내가 애 셋 났고 사느라 영화관에 못 간지 몇 년이나 됐는지 알아?"

"그건 누나 사정이지. 그러게 애를 셋이나 낳으래?"

"뭐라고? 이 자식이! 누나 집에서 살려면 조카들 봐줘야지. 그걸 바로 디폴트라고 하는 거야!"

"뭐야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드라마 좀 작작 봐. 근데 막내는 누나 젖 먹어야 하잖아?"

"냉동실에 유축해 놓은 거 많아. 이번엔 젖이 넘친다야. ㅎㅎㅎㅎ"

"좋~겠다."

"아이스크림 사 오고."

"에이, 진짜. 알았다고."




누나네 집에서 지내기 시작한 것은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부터였다.

엄마는 나를 43살에 낳았다. 순이 누나를 어렵게 낳은 후 더 이상 아기가 생기지 않아 포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생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 폐경이 빨리 되었다고 생각했다나....  배가 불러오는 것도 엄마는 그냥 살이 쪄서 똥배가 나온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엄마 뱃속에서 5개월이 되도록 존재감이 전혀 없었던 내가 정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기적이라고 했다. 하마터면 내 이름이 홍이가 아니라 '기적'이 될 뻔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누나는 이미 10살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누나는 이미 고등학생이었고, 남자친구가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누나는 내가 형이라고 부르던 사람과 결혼을 했다. 내가 중3일 때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나는 아직 어린데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너무나 빨리 어른이 되었고, 늙어버렸고, 끝내 죽어버렸다. 다행히도 누나가 낳아준 조카들이 있었기에 가장 어린 사람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였다. 아버지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나를 아들이 아니라 손자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하긴, 50이 다 된 나이에 본 아들이었으니 오죽할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아파 보였다. 기침을 많이 했고, 허리는 구부정했다. 그런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고 따라다니면 아버지 친구들이 용돈을 쥐어주곤 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나는 아버지 곁에 있었다. 엄마가 너무 바빠 나를 아버지에게 맡긴 것이었는데, 나에게 아버지를 맡긴 것인지, 그 반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귀찮은 두 존재를 한 번에 해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를 찌르는 듯한 알코올 냄새와 바삐 걷는 발자국 소리가 익숙해질 때 즈음 아버지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거칠게 몰아쉬던 아버지의 숨이 잔잔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날 밤. 아버지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고, 아버지 곁에 누워 있던 나는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의 몸에서 노란색 빛을 보았다. 그 빛이 너무나도 밝고 예뻐서 슬픔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통곡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그 빛의 출처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 후부터 나는 모든 사람들의 빛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빛의 색깔운 다르다. 초록색 계통의 빛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어둡고, 어떤 사람은 야광처럼 빛난다. 또 어떤 사람은 형광등처럼 날카롭고, 어떤 사람은 둔탁하게 어둡다. 처음엔 빛만 구별할 수 있었는데 점점 빛의 형태까지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둥근 형태부터 몽글몽글한 형태, 뾰족하거나 각진 형태까지. 그 형태도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그 빛을 무지개라고 부른다.



내가 찬이를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무렵 나는 사람들의 무지개를 보며 그 사람의 성격을 맞추는 놀이를 하곤 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무지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 색깔도 모두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빛이 어두울수록 성격이 어둡고, 밝을수록 성격이 밝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빛의 파동 역시 모두 달랐지만, 일관성이 있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파동이 뾰족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무지개는 대부분 밝고 둥글둥글했다. 그래서 어른들을 볼 때보다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찬이의 무지개는 특별했다. 평소엔 몽글몽글 했지만, 가끔씩 뾰족해지는 때가 있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빛깔 역시 어떨 때는 밝았다가 또 어떨 때는 어두웠다. 다른 아이들의 무지개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찬이 앞에서 유독 오두방정을 떠는 이유는 그 아이의 빛이 뾰족해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웃긴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찬이의 빛은 다시 밝아졌다.


'도대체 찬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찬이도 나처럼 뭔가 특별한 걸 보는 걸까? 능력이란 건 도대체 뭘 말하는 걸까?'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굳게 다문 찬이의 입은 열릴 줄 몰랐다.



아이스크림 할인가게에 들러 3개에 2천 원인 아이스크림을 바구니에 담았다. 각자의 취향에 맞게 먹으려면 그만큼의 노력과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난 내가 가진 돈에 취향을 맞춰야 한다. 누나가 아이스크림 값을 모른 척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누나가 주는 돈을 날름날름 모두 받아낼 수는 없다. 누나와 아이 셋, 그리고 나까지. 요즘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매형의 무지개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긴, 매형은 워낙 밝은 빛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형이라고 부를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빛과 파장을 가진 사람이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조카들이 뛰어나왔다.

"삼촌~~~ 홍이 삼촌 아이스크림 사 왔어?"

"응, 자 여기."

"에이 난 월드콘 먹고 싶은데."

"에이, 난 설레임 먹고 싶은데."

"야, 그건 너무 비싸. 삼촌이 돈이 어딨냐?"

"삼촌도 돈 벌면 되잖아?"

"삼촌은 아직 학생이거든!"

"삼촌은 삼촌인데 왜 아직도 학생이야? 왜 삼촌만 맨날 학생이야? 왜 삼촌은 안 늙어?"

"뭐라고???"

나는 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고 있는 두 꼬마 녀석을 어이없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란 참 상대적이다. 두 꼬마의 몸에서 밝고 반짝이는 분홍색 무지개가 일렁였다.  

"야, 빨리 와봐. 허리가 아파 죽겠다."

누나가 다가오더니 막내를 내 품에 안겼다.

"아 뭐야 누나. 나 옷도 안 갈아입었는데."

"야, 괜찮아. 너 담배 안 피지? 그럼 됐지 머. 야 내가 지금 담배 피우게 생겼어. 아주 죽겠어. 애들 때문에 꼼짝도 못 하고 사는 게 무슨 기분일 것 같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나 이제 고2라니까!"

"미리 알아 둬. 넌 절대 애 셋 낳지 마. 결혼도 일찍 하지 마."

"매형한테 다 이른다."

"일러라, 일러. 오늘 또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잖아. 나만 맨날 독박 육아야."

"누나, 내가 독박육아 같은데....."

"용돈 줄게. 이번주말 알지? 우리 애들이 널 너무 좋아하잖아. 응? 알았지?"

"알았어. 봐줄게. 대신 용돈 잊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자 이제 너도 쉬어. 뭐야 시간이 벌써 10시야? 야~ 너네 얼른 양치해!!"

누나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딸들을 향하며 말했다. 누니 뒤로 아버지와 똑같은 무지개가 일렁였다. 밝고 샛노란 빛이었다.


이제 6개월 된 아기에게서 꼬릿 한 젖비린내가 났다. 이제 막 모유를 먹고 온 모양이다. 꼬물대는 아이를 세로로 안은 후 등을 토닥이며 트림을 유도했다.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 중에 이렇게 아기를 잘 보는 사람은 나뿐일 것이다. 이렇게 작은 아기들은 아직 무지개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욱 궁금하다. 이 아기들이 갖게 될 무지개가 어떤 모습일지....



무지개는 비가 온 뒤 갑자기 해가 뜰 때 공기 중에 남아있는 수분에 햇빛이 비치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자연현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건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이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죄로 물든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약 1년 동안 비를 내린 신과 신이 시키는 데로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 노아. 다시는 물로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는 신과 연약한 인간 사이의 약속이 바로 무지개다. 그래서 무지개는 신과의 약속, 언약, 희망이라고 해석한다.


무지개는 하나의 빛으로만 만들 수 없다. 7개의 각기 다른 색깔과 빛이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로 무지개라고 부른다.



어둡거나 밝은 빛들이 일렁이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며 생각한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빛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거라고. 어두운 빛도, 밝은 빛도 있는 그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아마도 사람들의 이 무지개는  나를 좀 알아봐 달라는 아우성인 것 같다.


나의 아픔을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만 있더라도 어두움에서 밟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




"끄어억"

조그마한 녀석 입에서 아저씨 같은 트림 소리가 났다.

"어이구 우리 지욱이 트림도 잘 하네. 시원해쪄? 삼촌이 해주니까 더 좋지? 그치?"

트림을 한 후 속이 편해졌는지 조그마한 아기가 방실방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공중에 있는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을 뻗었으며 흔들었다.

"우리 지욱이도 뭘 보는 거야? 뭐가 보이는 거야? 삼촌 무지개가 보여? 응?"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방실거리며 웃었다.


알고보면 아기들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다만 말을 못할 뿐.....

이전 04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