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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12. 2024

내 손을 잡아 줘! 1.

결말은 자유


경애가 옷을 갈아입고 병동으로 들어온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이브닝 근무 시간이 시작하려면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두 달 전에 입사 한 단비는 이미 와 있었다.


“어머, 선생님. 벌써 오셨어요?”

“응, 차가 안 막혀서. 자기도 일찍 왔네.”

“아 네. 미리 일 좀 체크해 놓으려고요. 물품 카운팅은 다 했어요. 근데 오늘따라 산모가 좀 많은가 봐요. 베드가 가득 찼어요.”

“그래? 오늘 좀 바쁘겠네. 한꺼번에 진통 몰리면 안 되는데.”

“그래도 멀티산모(경산모)가 한 명뿐이에요. 초산이 좀 많네요.”

“그럼 시간 좀 걸리겠는 걸.”

“그렇죠?”

경애는 데이 근무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며 의자에 앉았다.

“쌤, 커피 한잔?”

“응, 내가 알아서 마실게. 고마워.”

“저도 한잔 마실 거예요. 제가 타 올게요.”

단비는 노란색 믹스커피를 흔들었다.

“어. 그래, 고마워.”

바쁘게 돌아가는 스테이션을 뒤로하고 간호사 휴게실로 들어갔다. 휴게실이라고 해봤자 좁디좁아서 다리를 쭉 뻗을 수도 없었다. 인계 시간까지 여기서 잠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경애는 휴대폰을 들고 연예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저녁 9시쯤 되자 여기저기서 산모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저 아직 멀었나요? 저 무통 주사 좀 놔주세요. 네?”

“산모님, 아직 무통 달 시간이 안 되었어요. 조금 더 있다 놔 드릴게요.”

그때였다. 202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경산모였다. 경애는 빠른 걸음으로 202호로 가 문을 열었다.

“선생님, 저 아래로 쏠리는데요. 왠지 곧 나올 것 같아요.”

“아 그래요? 잠시만요, 한번 볼게요.”

경애는 얼른 장갑을 끼고 내진을 해보았다. 이미 질이 활짝 열려 있었고, 까만 아이 머리가 보였다.

“어머 얼른 준비할게요. 숨 크게 쉬세요. 아직 힘주지 마세요. 선생님~~ 선생님~~”




“자, 아기 나왔습니다. 잘생긴 왕자님이시네요. 산모님 고생하셨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잠시만 그대로 계세요, 이제 태반 나올 거예요.”

“네. 선생님, 휴. 셋째라 그냥 퐁 나오네요.”

“산모님이 경험도 있으시고 또 힘도 좋으셔서 그런가 보네요.”

“아, 네. 자기야, 우리 아기 누구 닮았어?”

“어, 나 닮았지. 아이고 이뻐라.”

“이쁘긴, 얼굴 보이지도 않는구먼.”

산모와 그녀의 남편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김 선생님은 고개를 잔뜩 구부리고 산모의 회음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네 태반이 나왔다.


경애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감싸고 몸을 닦았다. 흡입기로 아이의 입과 코에 있는 이물질을 제거하자 아이가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온몸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키와 몸무게, 머리둘레를 잰 후 아이를 보온대에 올렸다. 파란색 팔찌에 산모 이름을 쓰고 태어난 날짜와 시간, 몸무게를 쓴 후 아이의 조그마한 발에 채웠다. 그리곤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쥐고 있는 아기의 두 손을 잡다. 경애는 질끈 감고 있는 아기의 두 눈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넌 커서 노래를 부르겠구나. 그런데 좀 힘든 시간을 보내겠네. 부디 잘 이겨내서 좋은 가수가 되길.’


경애는 아기를 산모 가슴에 올려주었다.

“산모님, 잘생긴 아들 여기 있어요. 가슴에 올려 드릴게요. 젖 좀 한번 물려 보시겠어요?”

“네. 이번엔 꼭 모유수유 성공해야 하거든요. 위에 두 딸들은 모두 실패를 해서요.”

“아, 그러셨구나. 한번 물려 보세요. 아기들은 다 기억하니까요.”

“네. 감사해요.”

김 선생님은 이제 회음부를 꿰매고 있었다. 분만 후에 회음부를 꿰맬 때마다 경애는 의아했다. 산모들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니 말이다. 그만큼 아기를 낳는 게 더 아프다는 말일까?



경애는 비혼주의자이다. 그녀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최근에도 연애를 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건 모두 경애의 손 때문이었다.




경애가 사람들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건 일곱 살부터였다. 친구들의 두 손을 잡으면 눈앞에 영화 같은 장면이 나타났다. 처음엔 경애도 그게 뭔지 알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엄마에게 말했더니,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이 무서워한다면서.


하지만 사람들의 손을 완전히 안 잡을 순 없었다. 그럴 땐 손에 힘을 빼고 살짝 잡던지, 눈앞에 장면이 나타나도 보이지 않는 척을 했다.

딱 한번, 절친한 친구 민이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민이는 자기의 미래를 알려달라고 했다. 경애는 민이의 두 손을 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민이가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술에 취해 있었고 민이 옆에는 3살쯤 돼 보이는 아기도 있었다. 너무 놀란 경애는 민이의 손을 놔 버렸다.


“어때? 내 미래는?”

“어, 그게. 좋아. 이쁜 아기가 보였어,”

“그래? 우와, 나 결혼할 수 있나 보네. 신난다.”

경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미래를 본다는 것이 이렇게 아프고 슬픈 일인지 미쳐 알지 못했다. 그 후로 경애는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게 두려웠다.



세 달 전, 친구 민이의 결혼식이 있었다. 경애는 민이가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말렸지만, 민이가 너무 행복해하는 모습에 어쩔 수 없었다. 미래를 알지만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경애가 분만실 간호사가 되기로 한 건 순전히 아기들 때문이었다. 막 태어난 아기들의 작은 손을 잡으면 아기들의 미래가 보였다. 어른들에게 보이는 찌들고 힘든 미래가 아기들에게선 보이지 않았다. 아기들에게는 희망과 소망이 보였다. 그건 경애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대신 경애는 결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민이의 미래가 자신의 미래는 아니지만, 두려웠다. 남편의 미래를 보는 것도, 자신이 낳은 아기의 미래를 보는 것도. 그 미래들이 모두 자신의 미래가 될 것 같았다.



10여 년 전, 경애가 분만실에서 막 일을 시작한 때였다. 선배 간호사 선생님이 바쁘게 움직일 때 경애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손을 잡아보았다. 아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애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이미 다 아는 눈이었다. 경애는 아기와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었다.

‘넌 특별한 아기구나. 나도 특별한 사람이란다. 하지만 특별하다는 것이 항상 좋은 건 아니지. 너도 그걸 알게 되겠구나. 힘내렴. 너만 그런 건 아니란다. 모든 사람들에겐 비밀이 있단다. 잘 자라렴 아가야.’

경애의 마음속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기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 뒤로 경애는 아기들의 손을 잡아주며 축복해 주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 엄마들의 손은 잡지 않았다. 단지 엄마들에게 아기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기 눈이 초롱초롱한 게, 정말 특별한 아기 같아요.”

이런 식이었다.

오늘도 경애는 새로 태어난 아기를 산모 가슴에 올려주며 축복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기 입이 정말 크네요. 노래를 잘하려나 봐요.”

그 말이 아기와 엄마에게 축복이 될지, 독이 될지는 경애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그래, 내일은 오픈가?”

“네. 저 내일은 실컷 잠이나 자려고요.”

“오픈데 잠을 잔다고? 놀아야지, 무슨 잠이야. 젊은 사람이”

“평일 낮에 같이 놀 친구가 있어야죠. 혼자 놀기는 싫고요.”

“그래, 그럼 푹 쉬고, 잘 가.”

“네. 선생님”

단비는 발랄하게 머리를 흔들며 걸어갔다. 경애는 버스가 끊기기 전에 버스를 타려 급히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두운데 글씨가 보일까? 저러다 눈 나빠질 텐데.’

경애는 그가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연금술사 책이었다. 그녀도 읽어 본 책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주인공이 보석을 찾으러 사막으로 갔던 것 같은데…….

308번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경애는 버스에 올라탔다. 남자도 그 버스를 타야 하는지 급하게 책을 덮고는 버스에 올랐다. 늦은 저녁이었지만 사람이 꽤 많았다. 빈 좌석이 한 개 있었다. 경애와 그 남자가 동시에 그 좌석으로 향하는 도중에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를 하고 말았다. 순간 다리가 꺾여 뒤뚱거리며 넘어지려는 찰나, 남자가 경애의 손을 잡았다. 경애의 눈앞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자와 자신이 나란히 앉아 웃고 있었고, 여자 아이 한 명이 그들 앞에서 꽃을 꺾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신호등이 바뀌어서요.”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남자가 경애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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