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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Mar 19. 2024

그녀의 취향. 1


알람 소리가 들렸다. 단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가 넘었다.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일어나려다 다시 대자로 누워 버렸다.


"오늘 오프지. 한 시간만 더 자야지."


남들은 모두 회사에 가서 열심히 일할 시간, 이불속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으니 꼭 백수가 된 기분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로 눈이 부셨다. 이미 정신은 맑아졌지만 일어나기가 싫었다. 오늘은 수요일. 평일 낮에 만날 사람도, 연락을 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 모두 간호사이다 보니 병원 일로 바쁘거나 듀티가 달라 약속 잡기가 힘들다. 친구들을 만나려면 우연히 듀티가 같거나, 한 달 전에 미리 약속을  잡고 스케줄을 신청해야 한다. 한 달 후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미리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비는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단비는 휴가를 신청할 때마다 선배 간호사들의 휴가를 가까스로 피해 적어냈다. 신참 간호사 주제에 원하는 날짜에 오프를 신청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룰이 어디 있냐고?

눈에 보이는 룰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규칙은 늘 존재한다. 그걸 보지 못하는 자는 눈치도, 버릇도, 싸가지도 없는 간호사가 되고 만다. 다행히도 단비는 그런 규칙을 읽을 줄 알았다.




단비는 이미 맑아진 정신으로 자는 척 누워 있는 것이 더 웃기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단비의 엄마, 아빠는 아침 내내 고양이처럼 사뿐거렸다. 문도 살살 닫고, 밥도 숨죽여 먹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간호사가 되면 걱정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딸이 밤늦게까지 일하고 오거나, 밤을 새우고 오는 날이면 이상하게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취직이 잘 된다는 말만 듣고 간호학과로 가라고 했던 자신들 때문에 딸이 고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족 중에 의료인이 한 명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지인의 딸이 대학병원 간호사라서 부모님이 아플 때 척척 알아서 병원 진료도 잡아주고, 영양제도 놔주는 게 부럽기도 했다.

집안에 간호사가 없을 땐 그 직업이 좋아 보이기만 하더니, 내 딸이 간호사가 되니 모든 간호사가 안쓰럽게 보였다.



단비는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마쳤다. 병원이 아닌 곳에 갈 때는 좀 더 화려하게 화장을 하는 편이다.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마스카라로 눈에 힘도 주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지울 테지만, 손톱에 붉은색 매니큐어도 발랐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는 철저하게 병원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혹여나 자기 몸에서 소독약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닌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눈치채지 못할 병원 냄새를 물리치려 샤넬 넘버 5를 칙~ 뿌렸다. 큰맘 먹고 산 이 향수를 언젠가는 '칙~'이 아니라 남들처럼 '칙~ 칙~' 뿌려보고 싶다고 단비는 생각했다.



그녀는 먼저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갔다. 그곳엔 항상 사람이 많다. 책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던데, 그 서점엔 온통 책과 사람뿐이다. 단비는 환자와 의사 사이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 같은 존재가 아니라 책과 사람 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어있는 느낌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녀는 신간 코너로 갔다. 매대에 진열된 책의 표지를 하나하나 만져 보았다. 마치 이제 막 엄마의 몸에서 빠져나온 신생아 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이 책들 중, 몇 개나 살아남을까?'

이 생각을 하니 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지갑을 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신간 옆에 있는 베스트셀러 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한창 잘 나가는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1년 넘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자기 계발서와 어느 연예인이 출간한 에세이. 최근에 드라마화되어 역주행을 시작한 소설까지. 두꺼운 하드보드 표지에 현란하게 새겨진 책 제목들은 너무 위풍당당해 표지를 뚫고 뚜벅뚜벅 걸어 나와 일렬로 줄을 맞춰 행진할 것만 같았다.

단비는 어지러운 눈길을 거두고 베스트셀러 앞을 느리게 지나쳤다.


‘내가 아니어도 사줄 사람 많으니까 뭐. 굳이 나까지 사지 않아도 되지?’


사실, 잘 나가는 책에 대한 단비의 감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애써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마음엔 질투심을 훌쩍 뛰어넘은 감정이 서려있었다. 그녀는 서점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국내 소설 분야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낯선 작가들의 이름을 훑어본 후 책 세 권을 빼 들었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유명한 작가들의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면서도 무명작가들의 책은 꼭 돈을 지불하고 사야 직성이 풀렸다. 동병상련의 마음이었다.




단비는 3년 전에 소설을 하나 썼다. 간호 대학에 다닐 때였다. 친구들이 해부학 공부를 할 때, 그녀는 소설을 쓰느라 밤을 새웠다. 신춘문예 공모전에 매번 작품을 보냈지만 잘 되진 않았다. 하지만 지난한 노력 끝에 어느 작은 출판사를 만나 책을 할 수 있었다.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때는 온 세상이 자기편인 것 같았고, 못 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드디어 유명한 소설가로 이름을 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의 소설은 빛을 보지 못했다. 애로스와 관능으로 점철된 로맨스 소설 사이에서 호러 소설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물론 호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있긴 했지만 극소수였다.


단비는 스티븐 킹의 미저리 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경험이 필요했다. 그녀는 일단 유명한 소설가가 아닌 유능한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실감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홀히 하던 간호사 국가고시 시험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합격하여 간호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녀가 분만실을 선택한 건 순전히 소설 때문이었다. 단비는 애 낳는 경험은커녕, 사랑에 대한 경험도 없었다. 영화와 책으로 배운 키스 때문에 대학 때 사귄 남자 친구와 처절하게 깨진 후론, 더욱 그랬다.

그녀는 산모들이 진짜 아파하는 모습, 소리 지르는 모습, 아기가 나오는 그 순간의 상황들을 쓰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단비의 노트북에는 그녀와 함께 일하는 간호사들과 의사들, 산모들과 아기들에 대한 묘사가 가득 담겨있다. 특히 함께 일하는 경애 선생님은 보면 볼수록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눈빛부터 범상치 않았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의 손을 잡고 아기와 눈빛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단비는 경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책 세 권의 값을 카드로 지불했다. 이 중엔 기대보다 재밌는 책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명인 이유가 이해되는 책도 있을 거라는 걸 안다. 단비의 책장엔 이런 책들이 쌓여 있다. 책을 가방에 넣고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지나 맞은 편의 작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대형 커피숍을 가지 않는 이유 역시 베스트셀러 책을 굳이 사지 않는 이유와 같았다.

커피숍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지만 맛있는 커피를 주는 곳도 있었고, 규모가 작기 때문에 맛이 별로인 커피숍도 있었다.

모든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지 않는 건 단비만의 성향이었다. 누구는 그걸 유난스럽지 않아서 좋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특별한 취향이 없는 거라 지적했다.

단비는 취향을 믿지 않았다. 단지 경험을 믿을 뿐이었다.


이번에 들어간 곳은 “달”이라는 커피숍이었다. 커피숍 이름처럼 카페엔 달 모양의 모빌과 달 그림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게 너무 적나라해서 단비는 당황했다.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달고 축축한 것을 좋아해야 할 것만 같았다.

캐러멜 마끼아또를 시켜야 하나 고민하다 여느 때와 같이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이제 느긋하게 새로 산 책을 읽으며 시간을 때워야겠다 생각했다.

 

 

세 권의 책 중에 “밤의 진실”이라는 책을 펼쳐 보았다. 책의 표지가 어둡고 칙칙한 거 보니, 딱 자기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작가 이름도 역시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다.


“김문별? 여자야, 남자야. 필명인가?”


그녀는 습관적으로 앞날개를 펼쳐 저자 소개부터 읽었다. 저자 소개 란을 보면 작가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달과 별을 좋아해 낮보다 밤을 더 좋아하는 사람]


딱 한 줄의 저자 소개를 보고 단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간단한 소개는 처음이었다. 이번엔 저자가 어떤 사람일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프롤로그를 건너뛰고 첫 챕터부터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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