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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Feb 27. 2024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1.

단편소설 <결말은 자유>


민주를 다시 만난 건 수학 학원에서였다.

처음엔 낯설지 않은 얼굴 때문에 긴가 민가 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이 걔를 부르는 소릴 듣고 '아!' 하고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보니, 웃을 때마다 생기는 왼쪽 볼의 보조개 하며, 눈웃음 하며, 10년 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는 척할 수 없었다. 아니, 제발 걔가 날 알아보지 않길 바랐다. 오랜만에 이 학원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학원 선생님도 좋았다. 고등학생인 우리에게 잔소리 대신 조언을 해주었고, 억지스럽게 공부시키지 않았다.

잔소리와 조언은 종이 한 장 차이만큼 얇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어른들은 대부분 조언이랍시고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이번 학원 선생님은 잔소리처럼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얘들아 요즘 얼굴이 왜 이렇게 야위었냐? 요즘 잘 못 먹니? 공부가 힘들어?"

"아 네. 아닙니다. 요즘 햇빛을 못 봤어요."

"그래, 고생이 많지. 햇빛을 봐야 광합성이 되고, 에너지도 생기는데 말이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몸의 에너지가 더 중요한 거야. 핸드폰도 하루종일 충전을 안 하고 들고 다니면 빠때리 다 떨어지고 꺼져버리잖아. 핸드폰 충전은 엄청 신경 쓰면서 우리 몸 충전을 신경을 못 쓴다니까. 그게 다 우리 어른들 때문이지만 말이다.  충전이 좀 필요해 보이는데? 그런 의미에서 뭐 먹을 거라도 사줄까?"


선생님이 먹을 걸 사줘서 좋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저 잔소리를 기분 좋게 말해준다. 다른 선생님들 같았으면 이렇게 말했을 게 분명하다.


"야 니들, 왜 이렇게 비리비리 힘이 없어? 응? 공부하려면 체력도 중요한 거 몰라? 체력관리도 자기 관리라고. 알았어? 운동 좀 하란 말이야, 인마. 지금 성적이 평생 너희들의 삶을 지배한다는 거 명심하도록. 자 그런 의미에서 수학책 48페이지!!"




“너 혹시……. 김 찬 아니니?”

날 부르는 소리에 나는 바위처럼 우뚝 서 버렸다. 이제 다 틀렸다. 제발 날 알아보지 않길 바랐는데, 민주도 날 알아버린 모양이다. 하긴, 10년 전의 내 모습에서 키만 컸으니,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 차니 차니 김차니~ 누구야? 누구? 응? 누구야? 오호~ 이쁜데?”

올챙이 같은 새끼, 홍이가 자꾸만 옆에서 치근덕대며 실실거렸다.

"야 쫌, 저리 가라."

"왜? 왜? 나 저리 보내놓고 뭐 하려고? 왜?"

"아 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친구였던 홍이 역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까불댄다. 그래도 홍이는 얼굴이 좀 변했다. 초등학생 때는 통통하게 살집이 있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쑤욱 크더니 아주 딴 사람이 돼버렸다. 홍이를 보며 살이 키가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민주를 돌아보며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 안녕. 오랜만이다.”

이렇게 싱겁게 아는 척을 해버리다니, 망했다.

“야, 누구냐니까?”

홍이 자식이 자꾸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야 쫌, 그냥 유치원 같이 다니던 애야.”


민주의 얼굴은 예전 그대로긴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예뻐진 것 같았다.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시간 있니? 너무 반가워서 그래. 저기 편의점 안 갈래? 내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너 아직도 아이스크림 좋아해?”

“어, 아직 좋아해.”

“안녕, 난 차니 차니 김차니 친구 홍이 홍이 박홍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나도 아이스크림 좋아하는데, 특히 난 스크류바를 좋아해. 삐익 삐익 꼬였네~ 들쑥날쑥 해~ 으해해해~”

홍이는 갑자기 다리와 몸을 베베 꼬기 시작했다. 휴~ 너무 창피해 이대로 가버리고 싶었다.

“어 그래. 반가워. 난 민주라고 해. 가자, 내가 사줄게.”

난 민주의 말에 거절도 못하고, 홍이의 익살에 반박도 못한 채 홍이의 손에 이끌려 민주를 따라가고 말았다.


민주는 지나가는 여자애들한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스크류바 세 개를 들고 나왔다.

“여기 앉아서 먹고 갈까? 저녁이 되니 날씨가 시원하네”

민주가 손으로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 뜨렸다. 올챙이 같은 홍이 자식은 옆에 앉아 연신 싱글벙글하며 스크류바를 혀로 핥아먹고 있었다.


“사실 긴가민가했어. 근데 이름 듣고 알았지. 나 진짜 너 보고 싶었는데, 그날 이후로 널 못 만났잖아.”

“어, 그러게.”

“너 아직 그 동네 살아?”

“아니야, 이사 갔지.”

“그렇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민주가 많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낼 순 없었다.

“너 아직도…….”

“응? 아직도 뭐?”

“아직도, 그.... 능력 남아 있어?”


민주의 말에 스크류바를 혀로 핥아먹고 있던 홍이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능력이라니? 이 자식이 능력이 있어? 무슨 능력? 나 이 자식이랑 초딩 때부터 친군데, 아~무 능력 없던데. 아, 능력이라면 하나 있다. 무관심, 무욕.  살다 살다 이렇게 욕심 없는 놈 처음 봤다니까. 떡볶이에도 관심이 없고, 노래방에도 관심이 없고, 연예인에도 관심이 없고, 여자애들한테도 관심이 없고. 부처님인 줄. 얘 유치원 때도 그랬냐?”

나는 홍이를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저 주둥이를 한데 갈기려다 앞에 민주가 있어서 겨우 참았다.


“아, 그렇구나. 사실, 궁금했어. 아직도 그 능력이 남아 있는지.”

“그런 능력이 어딨어. 없지. 그때도 내가 거짓말한 거야. 농담이었다고. 너 진짜 믿었냐? 너 진짜 순진했다야.”

내 대답에 해바라기 같던 민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스크류바가 녹아 분홍색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입 안에 쑤셔 넣고 와그작 씹었다. 세 입 만에 아이스크림은 자취를 감추었다.

“야, 늦겠다. 얼른 집에 가자. 야 박 홍이 일어나. 가야지.”

“어, 나 아직 남았는데. 나 엄청 아껴먹고 있단 말이야.”

“얼른 일어나. 민주야 반가웠어. 학원에서 또 만나.”

“어, 그래. 잘 가. 난 좀 이따 엄마가 데리러 올 거야.”

“어, 그래.”


민주 때문에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한 번씩 민주를 생각하긴 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정말 잊고 싶다. 그 기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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