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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Feb 20. 2024

러브레터의 진실 2

단편소설


학교 앞 문구점에는 하트, 꽃무늬, 곰돌이 무늬의 편지지와 봉투가 있었다. 그중에 연분홍 하트 무늬의 편지지와 봉투를 샀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꽃무늬보다는 하트가 낫지 않나?

밤새 고민하며 편지를 썼다. 어렸을 적에 같이 놀았던 이야기도 쓰고, 지금 학교생활이 어떤지도 썼다. 널 좋아하는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은 쓰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난 그저 걔와의 추억을 썼을 뿐. 충분하지 않은 설명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상상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게 바로 ‘여백의 미’라고 하는 것이지.


우표를 붙이고 집 앞 우체통에 넣은 후 학교로 뛰어갔다. 알 수 없는 승리감이 차올라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내가 걔한테 편지를 썼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고, 그 편지를 본 웅이는 분명 나와의 추억을 떠올릴 것이 뻔하다. 그러면 예쁜 척하는 걔의 러브레터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는.... 소꿉친구니까!!!



학교에 와 보니, 게네들이 막 떠들고 있었다. 일부러 들으려고 가까이 간 건 아니었지만, 내 모든 감각이 그쪽으로 향했다. 다른 소란한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교실 안에서 게네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이었다.


“나 이따가 웅이 만나서 직접 편지 주려고.”

“직접?”

“응, 학교 끝나고.”

“우와 너 대단하다. 어디서 줄 건데?”

“학교 앞에 놀이터 있잖아. 거기서.”

“만나자고 말은 했어? 진짜 멋지다. 로맨틱해.”

“아직. 이따 점심시간에 말하려고. 같이 가줄래?”


헉, 큰일 났다. 편지는 직접 주는 거였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우체통에 넣어 버렸는데, 이를 어쩐담. 오늘 쟤네들이 만나서 사귀기라도 한다면? 내 편지가 내일 그 자식에게 도착한다면? 내 편지가 먼저 도착해야 하는데.... 특급우표를 사지 않고 일반우표를 붙인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 망했다.      


온종일 편지 생각을 하느라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게네들이 우르르 사라지는 걸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침에 차올랐던 승리감은 낭패감으로 바뀌어 나를 짓눌렀다.

집에 갈 때는 일부러 놀이터를 피해 빙 돌아갔다. 왠지 그쪽으로 가면 웅이와 게네들이 함께 있는 걸 보게 될 것 같았고, 그 모습을 보면 더 이상 참지 못한 그 무언가가 내 몸에서 빠져나와 흐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내가 보낸 그 편지를 사수해야 한다!!



다음 날,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했다. 선생님은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생리통이 심하다고 했더니 그냥 보내 주셨다. 웅이네 집 앞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렸다. 오후 2시 즈음되었을 때,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에도 매번 오시던 그 아저씨다.


“아저씨, 혹시 이웅한테 온 편지 있어요?”

“왜 그러는데?”

“그거 있으면, 저 주세요.”

“인마, 그런 게 어딨냐? 주인한테 줘야지. 근데 넌 학교 안 가고 왜 여깄냐?”

“그냥, 저 주세요. 그거 제가 쓴 거란 말이에요. 빨리 주세요.”

“허 참, 기다려봐. 확인 좀 해보고. 어디 보자… 니 이름이 뭐지?”

“박 순이예요.”

“어, 여기 있네. 근데 왜 편지를 보내놓고 안 주겠다는 거야?”

“그럴 일이 좀 있어요. 감사합니다.”

난 그 편지를 낚아채다시피 빼앗아 들고 집으로 뛰어갔다. 휴~ 살았다.      



교실은 시끌시끌했다. 게네들이 또 모여서 쑤군덕거리고 있었지만, 이번엔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매번 큰소리로 떠들더니 오늘따라 소곤거리기만 한다. 궁금해 죽겠는데....  걔의 표정을 봐도 도통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내 편지를 사수했으니. 하마터면 웅이한테 꼬투리 잡힐 뻔했다. 그랬다면 두고두고 날 놀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게 다 게네들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 나를 괜히 들쑤셔서 가슴이 훌렁훌렁거리게 만들다니.


그런데 가만, 날 들쑤신 게 정말 게네들인가? 아니면 웅이인가?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일기장을 하나 샀다. 이번엔 편지 같은 어처구니없는 거 말고, 훌렁거리고, 들썩거리는 내 마음을 일기장에 빼곡히 써보기로 했다. 아마도 일기장에도 웅이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을 테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에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꺼내놓지 않으면, 훌렁거리고 들썩거리다 마음이 모조리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하다.

혹시나 모르니 열쇠가 달려있는 일기장으로 골랐다. 우리 집에는 괴물 같은 녀석이 한 명 있으니, 그 괴물한테 들키는 날엔 난 이 세상에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며칠 뒤 집 앞 골목에서 그 자식을 만났다. 인사를 할까 말까 하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그냥 소꿉친구일 뿐인데!! 먼저 인사를 하려 고개를 돌리는데 걔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박 순이, 집에 가냐?”

“응.”

“바쁘냐?”

“아니, 별로. 왜?”

“같이 가자고.

웅이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나 너네 집에 놀러 가도 돼?”


헐,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우리 집엘 놀러 오겠다고?


“아니, 왜 갑자기?”

“그냥,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래서.”

“우리 엄마 계실 텐데.”

“아, 그러네. 그럼 너 토요일에 뭐 하냐?”

“나? 특별한 거 없지. 왜?”

“떡볶이 먹으러 안 갈래? 우리 자주 가던 뚱보 아저씨네.”

“어… 그래…”

“근데, 너… 나한테 뭐 줄 거 없어?”

“뭐? 없는데?”

“그래, 알겠어. 그럼 토요일 열두 시에 거기서 보자.”


웅이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쟤 다리가 원래 저렇게 길었었나? 원래 저렇게 등이 넓었나? 큰일 났다. 내 심장이 고장 난 모양이다. 왜 이렇게 훌렁거리고 난리야....




 

갑자기 자고 있던 막내가 앙~ 울었다. 시계는 이미 새벽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에휴, 내가 왜 완모를 하겠다고 결심했을까? 안방으로 들어가 울고 있는 막내를 안고 젖을 물렸다. 이놈의 인간, 들어오기만 해 봐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스물네 살에 첫 아이 낳은 뒤로 서른다섯이 되도록 애만 키우고 있는데. 지는 애 셋 아빠가 되어가지고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와? 술 취해서 들어오기만 해 봐라. 내가 그냥 어머니한테 다 이를 거야. 그날 떡볶이만 먹으러 가지 않았어도, 이 꽃다운 나이에 이러고 있지 않을 건데. 억울하다."


띡띡띡띡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들어왔나 보다. 고양이 새끼처럼 조심조심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온 웅이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 내일 너네 엄마한테 다 이를 거야. 애 셋 놔두고 새벽 한 시에 들어온다고. 이게 다 너네 외삼촌 때문이야. 아 진짜 억울해 죽겠네.”

“에이, 또 그 소리야. 말은 바로 해야지. 외삼촌 때문이 아니라 니 편지 때문이지. 네가 먼저 나 좋다고 고백했잖아?”

“뭔 소리야. 아니라니까. 편지는 썼지만,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니까. 너네 외삼촌은 내용은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내가 억울해 죽겠어.”

“야, 하트 편지 봉투에 들어 있는 편지가 러브 레터지, 그럼 뭐 위문편지겠냐? 암튼 미안해. 오늘은 어쩔 수가 없었어. 우리 막둥이 자나? 아이고 우리 막내 이쁘네. 찌찌 잘 먹고 있네.”

“만지지 마라. 먼저 씻고 와라.”

“알았다, 알았어.”


웅이가 욕실로 들어갔다. 그때 안방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아빠 왔어?”

“응, 방금. 왜 일어났어? 얼른 다시 자. 지금 새벽이야.”

“싫어, 아빠 보고 잘 거야.”

“그때 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야, 니들은 왜 다 일어나고 난리야.”

“언니가 없어졌어.”

“어이구. 빨랑 다 누워.”


첫째와 둘째가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막내는 아직도 찌찌를 빨고 있다. 얼마전부터 시큰거리던 팔목이 다시 아파왔다. 이게 다 그 편지 봉투 때문이다. 하트 무늬만 아니었어도....



나는 찌찌를 빨고 있는 막내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두 아이가 양옆에 누워 내 다리 위로 손을 올렸다. 아빠 보고 잔다던 아이의 숨소리가 깊어지더니 어느새 새근새근 고른 소리를 냈다.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샤워 부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웅이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젖을 빨다 잠든 막내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아이에게선 젖냄새와 함께 고소롬한 향기가 났다. 몸은 너무나도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모유수유를 끝내는 날, 웅이와 함께 매운 떡볶이를 먹으러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무거운 두 눈을 감았다.

아....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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