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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캘리 Mar 01. 2024

슬픔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는 날개가 있다

당신의 작은 용의가 마음을 일으킨다



  나에게 있어 장애는 해갈되지 않는 슬픔이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완벽한 타인처럼 느껴질 때.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좁혀준 것이 글이었다. 그 어디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숙명 때문이었을까. 새하얀 종이는 무결한 치유의 땅으로, 원고지는 펄떡이는 붉은 핏줄로 느껴졌다. 그 위에 촘촘히 쌓인 글들은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날개 같았다. 연약한 다리로 오래 걷지 않아도 되는, 현실로부터 가뿐히 날아오를 수 있는 글은 나의 오랜 벗이었다. 일찍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글쓰기를 진심으로 즐기게 된 것은 먼 나중 일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묻지 않아서 터놓고 싶은 일상을 썼고 엄마가 일기장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감추고 시를 썼다. 글은 나의 유일한 대나무 숲이었기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슬픔을 옮기지 않고 터놓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글과 친해졌고 글 쓰는 일상이 좋아질 무렵, 어느 인문학 책에서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마주했다.



슬픔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는
날개가 있다.


  

  순간 슬픔의 그릇을 가득 채우고도 매일 속울음이 넘쳐 울컥하는, 말 못 할 감정을 이해받은 듯했다. 슬픔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하늘은 저마다 날개를 주었다는 말에, 글쓰기는 나의 연약한 다리를 대신하는 튼튼한 날개라고 믿었다. 그날 이후 글은 유일한 장기이자 든든한 무기가 되었다. 타고난 몸의 약점을 뛰어넘을 날개가 생겼으니 차고 나갈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역설적이게도 작가를 꿈꾸고 글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마음이 말을 잃었다.






  어느새 나는 감정의 민낯을 마주하는 것이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 사랑하는 이들에게 슬픔을 옮기기 싫다는 이유로 감췄던 감정들이, 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빈칸으로 남았다. 여전히 글을 쓰는 행위만 지속할 뿐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감추는 데 익숙해진 시간 탓인지 진솔한 감정을 담아내기 어려웠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한 마음을 마주하고 표현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아무도 궁금해할 리 없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낮추며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일에 몰두했다. 철저히 자신을 숨겼고 허상의 세계를 창조하며 현실 속 나를 외면했다.

 


  나에게 주어진 날개를 이용해 나 자신으로부터 기를 쓰고 도망쳤다. 어떻게든 타고난 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펜을 잡았고 허구의 세상에서 나를 잊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에게 장애가 있는 내 몸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었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달라질 것 없는 오답이었다. 글 쓰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즐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유시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는 내가 있었다.    



  글을 짓는 허상의 세계에서만 한시적인 자유시간이 주어진다고 믿었으니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커졌다. 양쪽 날개에 보이지 않는 줄을 달고 정도껏 유영하다가 되돌아오는 듯했다. 결코 나을 수 없는 몸을 타고났다는 절망의 부르짖음이 자유로운 날개의 비행을 멈추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가로서 글을 짓는다는 핑계로 스스로를 수도 없이 외면했고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타고난 몸을 탓하기 바빴다. 대체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 사는 동안 해갈되지 못한 영문은 하늘에 대고 쏟아내는 설움으로 이어졌다. 이유도 모르고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아무리 익숙해도 괜찮아질 수 없는 아픔이었다. 어떤 날은 견딜만했고 또 어떤 날은 낯선 얼굴로 다가와 평온하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했다.



  예기치 않은 어떤 날, 줄곧 외면하며 유기해 왔던 마음을 마주했고 그동안 홀로 감당해 왔던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헤아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이 정한 답 근처도 가지 못하는 몸을 탓했고 나에게 주어진 날개는 그저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도구로 쓰기에 급급했다. 우두커니 버려진 마음을 마주하고 헤아리기 위해 지난 시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단 한순간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 없음을 알았다. 열두 살이 되도록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서 용감했을 뿐. 스스로 장애를 받아들인 적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나을 거라고 믿었으니 나이가 들어도 낫지 않는 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킬러 문항 같았다. 언젠가는 깃털처럼 가벼워질 줄 알았던 약점은 나아질 기미 없이 꼬리표처럼 졸졸 따라다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모든 불행은 나를 못 살게 구는 세상 때문이고 진정 나의 행복을 바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며 스스로 절망으로 내몰기 바빴다. 당시에는 누구보다 절박했지만, 결국 내 오랜 절망과 슬픔은 스스로를 애틋하게 여길 줄 몰랐던 그릇된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었고 실재의 나는 어떤 것에도 위협받을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





  슬픔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는 날개가 있다.


  이제야 그 말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 내가 가진 날개는 연약한 다리 대신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날개는 타고난 몸의 모양과 상관없이 저마다 세상을 살면서 부지불식간에 마주하게 되는 고통의 순간, 그 감정에 매몰되어 그릇된 마음으로 보지 않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슬픔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저마다 주어진 날개를 활용해 각자의 시나리오 너머로 가서 바른 마음으로 다시 보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었다.



  결국 내 지난 고통과 절망의 시간은 스스로를 가둬두었던 가리어진 시선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나 자신을 고쳐 쓸 수 없는 오답이라 생각하며 잘못 창조한 허구의 세상에서는 외로운 것이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줄곧 바깥으로 향하던 그 모든 볼멘소리는 스스로 위협받았고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뒤틀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달라져야 할 것은 오직 내 마음이었고, 달라진 것 또한 내가 전부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것이 알쏭달쏭하고 왜 나만 못 살게 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화가 솟구쳤건만. 바로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던 덮개를 거두고 나니 불공평하게만 보이던 그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혹여 누군가 나처럼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에게도 바르게 볼 줄 아는 마음이 있으니 그 힘을 믿고 다시 선택하라고. 당신의 그 작은 용의가 당신이 지금껏 지나 온 길과는 다른 곳으로 이끌게 될 테니, 주어진 날개를 활용해 시나리오 너머로 가라고 말이다.     



당신이 자기 마음의 힘을 믿는 만큼
해방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될 테니.





談담쟁이캘리

: 이야기하는 글쟁이입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찰나,

별 것 아닌 일상이 별 것이 되는 순간을

에세이와 시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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