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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총각 Mar 20. 2019

뭘 어떻게 해... 다 버려야지

가뭄, 태풍, 폭우

"현재 태풍 솔릭의 영향으로 제주 해상엔 많은 비와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2018년 8월 말. TV 뉴스에서 속보를 전하는 기자 한 분이 강한 비를 맞으며 태풍 소식을 전했다.




그로부터 보름 후, 며칠간 머물었던 경상남도 남해를 떠나, 전라남도 순천으로 향하였다.


'드디어 반 바퀴를 돌아 전라도에 입성했구나'


터미널에서 들리는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가 내가 전라도에 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터미널 근처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미리 연드렸던 순천의 한 배 농장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도착한 곳은 순천 낙안면에 위치한 한 버스정류장. 마을의 이장님이자 배 농장을 운영하시는 아버님은 차가 없으면 마을까지 걸어오기 힘들다고 하시면서 나를 데리러 온다고하셨다.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트럭 한 대가 나타났다.


"자네가 그 전화 던 학생인가?"


"네 안녕하세요~"


"안 그래도 일손이 많이 필요했었는데 잘 왔네"


아버님은 나를 차에 태우시고는 마을 자랑과 배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여기 낙안면은 배가 아주 유명한 마을이야. 보통은 나주배가 유명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낙안배를 더 알아준다니깐!"


"그런데 이번에 우리 마을에 태풍 피해가 좀 있어서..."


며칠 전 태풍 솔릭(2018년 8월)이 호남권을 지나면서 피해를 본 과수 농가들이 적지 않다 하셨다. 이번 태풍은 제주에서 내륙으로 올라오면서 세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태풍 이후 며칠 동안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속이 꽉 찬 배들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하셨다.


잠시 후 마을로 들어서니 여기저기 배 나무가 눈에 띄었다.


"아버님 이 마을에 배가 정말 많네요?"


"그렇지? 안으로 들어가면 더 많아"



"안녕하세요~"


"아이고 동영씨 잘 왔어요"


열심히 작업을 하시던 어머님이 나를 반겨주셨다. 나는 짐을 풀고, 어머님이 타 주신 커피 한잔과 함께 두 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 여름 내내 비가 안와 가뭄으로 고생했는데, 태풍 이후로 갑자기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배 상태가 말이 아니야... 좋은 상품은 다 떨어져 나갔어"


"가뭄에, 태풍에, 폭우에..."


하필 추석 대목 전에 이런 일이 발생해서 매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사과나 배를 잘 안 먹어서, 명절 대목이 아니면 물량이 잘 나가지도 않는데, 추석 대목을 앞두고 이래 버리니..."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있나. 하늘이 저러는데."


아버님은 드시던 커피잔을 비우시곤 탁자에 내려놓으셨다.


"남은 거라도 잘 살려야지. 슬슬 일하러 가볼까?"


이날 내가 할 일은 배 나무 밑에 상자를 옮겨두는 일이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인력이 배치되어 배 수확이 시작되는데, 배 상자를 일일이 들고 나르면 시간소비가 많기 때문에, 전날 어머님과 아버님 두 분이 상자를 나무 아래에 옮겨 준비해둔다고 하셨다.


나는 아버님과 함께 노란 배상자를 경운기(?)에 싣고, 밭으로 들어가 보았다. 들어서자마자 생각보다 규모가 큰 농장의 모습에 놀랐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배들을 보고 또 놀랐다.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배 아래로, 정말 많은 배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여기저기 뒹구는 배들을 모아둔 모습

"어머님 이게 이번에 태풍 피해 때문에 다 떨어진거예요?"


"응..."


"그럼 얘네들은 다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다 버려야지"


얼핏 봐도 크고 굵직한 놈들만 떨어져 있는 거 같았다. 태풍이 불면 크고 굵어 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최상급 배들이 가장 먼저 떨어진다고 하셨다. 한번 땅에 떨어지거나 충격이 가해진 배들은 그 주위가 쉽게 멍들고, 물러지기 때문에 상품 값어치가 없어진다고 하셨다. 안타까운 마음에 바닥에 떨어진 배들을 보고 있는데, 어머님이 배나무에 달려있는 멀쩡한 배를 따서 떨어진 배 옆에 버리셨다.


"어머님 그것도 버리시는 거예요?"


"응 이건 태풍에 봉지가 벗겨지면서 배가 햇빛을 받아 색이 빨개졌어. 다른 한쪽은 아직 파랗고"


"맛은요?"


"한번 먹어봐"


나는 어머님이 건네신 색 바랜(?) 배를 한입 크게 배어물었다. 맛있었다.


"맛있는데요?"


"그래 맛은 괜찮아. 근데 이게 조금 더 지나면 색이 완전 빨갛게 되거든. 그렇게되면 상품으로 나갈 수 있을까?"


"..."


"사람들은 배가 이런 색이면, 절대 안 사가"


어머님은 말씀이 끝남과 동시에 배를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버리셨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도시에 살면서 태풍의 피해를 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 밖에 나가지 못했던 것? 물론 뉴스를 보면 길거리에 간판이 떨어지거나 신호등이 떨어져 인명 피해를 보거나 재산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뉴스에서 태풍이 온다고 해도 크게 와 닿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분들은 달랐다. 태풍은 농부님들이 한 해 동안 지은 농사를 하루 아침에 망칠 수도 있고, 과수 농가의 경우 몇 년 동안 키운 과일나무를 싹 다 날려버릴 수 도 있다. 그만큼 농촌에게 자연재해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이번 태풍은 처음보다 세력이 많이 약해져 강한 태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가에 끼친 피해는 상당했다. 뉴스에서 봤을 땐 와 닿지 않던 사실들이, 현장에 와서 직접 경험해보니 농가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배들을 보며, 그동안 이 배를 관리하기 위해 땀 흘린 농부님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무엇보다도 더 마음 아프게 한 것은 이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시는 농부님들의 모습이었다. 항상 있는 일인 듯 무덤덤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씁쓸했다.


뭐 어쩌겠나 날씨를 맘대로 조종할 수 도 없고...

2018년 5월부터 10월까지, 지역 음식과 지역 농산물을 주제로 전국 배낭여행을 했습니다. 시골 농촌에 가서 일손을 도와드리고, 집 밥을 얻어먹으며 151일간 전국을 돌아다닌 여행. 직접 체험했던 농사일, 각 지역 농부님들의 다양한 이야기 등. 여행을 하며 느낀 모든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2018.09.07-09.10

전남 순천에서


@도시에서온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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