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유학 생활 에세이
독일에 살면서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바로 '게둘트(Geduld)'일 것이다. 게둘트는 '참을성 ∙ 인내'라는 뜻이다. 독일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내 스스로 꽤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또 상당히 자주 듣게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것은 내가 앞서 했던 '독일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 기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신속성 ∙ 편의성 ∙ 효율성 ∙ 서비스 마인드'와 같은 것들은 독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만약 독일의 공공기관이나 관공서에서 무언가가 빠르고 편리하게 처리될 뿐만 아니라 담당자가 심지어 친절하기까지 하다면, 그것은 정말 고마운 일일 것이다.
독일에서는 모든 업무의 처리 과정을 단계적이고 개별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한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보통 2주 정도의 게둘트가 필요하다. 내가 언제 뭘 요청했었는지를 잊어갈 때 즈음 답신이 온다. 한국인에게는 이것이 어떤 문제의 발생으로 인한 업무 지연으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독일인들에게 이것은 루틴과도 같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처리 속도 그대로, 해왔던 방식 그대로 진행하는 것일 뿐이다. 독일에서는 기관이나 부서별로 업무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고 규정이 상이하므로, 서류처리 과정이 길고 복잡하다. 그 때문에 그들 직원들이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는 서류철만큼은 아니어도, 일반 시민들의 경우에도 집의 책장 한 칸 쯤은 각종 서류들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또한 일처리가 도시마다 다르고, 담당자마다 다르며, 어제 오늘 다르고, 전화할 때 메일 보낼 때 직접 방문할 때 다 다를 수 있으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런데 사실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계획대로는 진행되지 않는다. 일사천리란 없다. 그러므로 꽤 많은 것들에 대해서 인내를 동반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유학 생활 초기, 독일에 막 정착할 때에는 이런 관공서 업무 미션들이 나의 전투력을 상승시켰으나, 다양한 상황들에 부딪히면서 전투력은 점점 상실되었다. 그리고 이 시스템과 속도에 대한 '순응'의 단계를 거쳐, 강요된 '게둘트'만 남게 되었다.
'기다림'과 '인내'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나는 독일인들이 '기다림'과 '인내'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로 '게둘트'라는 단어의 쓰임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어떤 일처리를 위해서 기다려 달라고 말할 때, '게둘트'라는 단어를 매우 흔하게 사용한다. 관공서 일처리 담당자의 메일에서도, 서비스 센터 상담 중 문의에 대한 답변에서도, 음식점의 대기줄에 서있을 때에도, 심지어 자동현금지급기의 화면에서도 이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냥 얼마 정도 기다려 달라고 말하면 될 것을, 게둘트를 가져달라고 말하는 것이다(Bitte haben Sie Geduld!). 나는 참을성이 강한 편이므로 아마 오래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참고 인내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좀 참으라고 얘기하는 것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은근히 참을성을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차 저 말 속에는 '당신이 예상하는 처리 속도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수 있으니 조금 참고 기다려 달라'는 비교적 긴 문장이 함축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독일인답지 않게 상당히 에둘러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정확히 언제까지 처리될지에 대해서는 가능성을 열어둔 채로, 기다리는 동안 게둘트를 가지라고 표현하니 말이다.